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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_종묘

종묘(宗廟), 조선 유교(儒敎) 이념이 고스란히 구현된 곳

younghwan 2010. 9. 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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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묘는 서울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숲이자 문화유산인 동시에 종묘 앞 거리는 오래전부터 서울의 좋지 않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또한 종묘는 동양의 유교 정신이 가장 적절하게 구현된 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묘의 모든 것은 유교식 절차에 따라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종묘의 구성 요소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종묘의 정전(正殿)으로 역대 국왕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종묘에서 특이한 곳은 아마도 입구에 있는 공민왕 신당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그만 규모이지만 고려의 국왕을 종묘에 모시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뜻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종묘의 정전(正殿)은 역대 국왕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현재 종묘에는19위의 왕의 신위가 모셔져 있으며 신실 한 칸에는 한분의 왕과 그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국가에 큰 업적을 남긴 왕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고 정의되어 있지만 그것은 조선중기에 정리가 되어서 업적이 적은 왕과 왕비의 신전은 양녕전으로 옮겨졌으나 조선후기 국왕들은 정전에 그대로 모셔져 있습니다. 단일 건축물(물론 한옥형태)로는 세계적으로 가장 길다고 하는데 신위가 늘어날 때마다 감실을 증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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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 탐방
 1. 하마비, 어정          2. 입구인 외대문      3. 종묘 삼도               4. 망묘루, 향대청
 5. 공민왕 신당           6. 재궁                   7. 전사청, 수복방, 제정        8. 종묘 정전         
 
9. 정전 출입문        10. 공신당, 칠사당      11. 악공청                           12. 영녕전 
   
종묘 위성 사진 (구글어스)

종묘 입구 종묘 시민공원에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종묘 시민공원에 있다. 태종이 종묘와 궁궐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은 존경의 표시로 가마나 말에서 내리도록 정하고 종묘 정문 앞 오른쪽에 새워둔 나무 푯말을 현종 때 돌로 된 하마비로 세웠다. 


이 우물은 조선 역대 왕들이 종묘에 왕래할 때 이 우물을 마셨다고 하여 '어정(御井)'이라 불리며 서울 4대문 안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이 우물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어정 주위에 시간을 알려주는 해시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울 종묘(宗廟)의 정문격인 외대문(外大門)입니다.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부르는 이 대문을 들어서면 종묘의 각 건물들을 연결시켜주는 삼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문이 세개로 구성되어 있는 듯 합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서쪽편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고 종묘 내부에서 광장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망묘루 앞에도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이 주위에 종묘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안내해 주는 많은 안내표지판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종묘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종묘의 구성물들을 연결해 주는 길입니다. 종묘 내부는
삼도(三道)로 이루어진 길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삼도는 가운데 높은 길인 신로(神路)는 조상신이 다니는 길 이고, 오른쪽편에는 왕이 다니는 길, 왼쪽편에는 세자가 다니는 길이 있습니다. 이 삼도는 정문격인 외대문에서 시작해서 왕이 목욕재개를 하는 재궁, 그리고 정전의 남문, 동문과 양녕전의 남문, 동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묘(宗廟) 입구인 외대문을 들어서면 좌측편에 작은 연못이 있고, 중앙으로 난 삼도(三道)를 따라서 조금 들어가면, 우측편에 작은 연못인 중지당이 있습니다. 그 동쪽편으로는 국왕이 종묘에 도착하면 잠시 머물러 쉬면서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하는 망묘루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망묘루 주위로 제사에 사용할 향 등을 보관하는 향재청이 있고, 동쪽편 끝에는 고려말 국왕인 공민왕을 모신 조그만 사당이 있습니다. 아마도 중지당과 망묘루 부근은 국왕과 국왕을 수행한 사람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광장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서울 종묘의 망묘당 동쪽편에는 고려 31대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와 함께 창건된 공민왕 신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공민당 신당에는 특이하게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함께 있는 영정이 가운데 있고 벽에는 준마도가 있습니다. 이 공민당 신당은 태조가 종묘를 창건할 때 같이 세웠다고 합니다. 이 공민당 신당이 뜻하는 의미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노국공주와 같이 있는 영정이 봉안되고 또한 종묘에 공민왕 신당이 있다는 것은 태조 이성계의 동시대에 살았던 공민왕에 대한 평가가 들어 있는 듯 합니다.


종묘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제사 하루전부터 국왕과 세자는 이 곳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정전의 동문을 통해서 들어갑니다. 북쪽에는 국왕이 머물던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재실(世子齋室), 서쪽에는 어목욕청이 있습니다. 국왕의 입장에서 종묘에서 제를 지낸다는 것은 아주 번거러울 수도 있었겠습니다.

종묘 재궁에서 하룻밤을 지낸 국왕과 세자가 삼도를 걸어서 동문으로 정전에 입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문 앞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하급관리나 노비들이 지내는 수복방이 있고 그 옆으로는 제기 등을 보관하는 전사청이 있습니다. 수복방 앞에는 제사에 쓰일 음식을 검사는 찬막단과 제물인 소,돼지,양을 검사하는 성생위가 있습니다. 전사청 동쪽으로는 제사에 쓰일 물을 긷는 제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종묘 정전에는 동.서.남 세 방향으로 출입문이 있습니다. 남문은 신들이 출입하는 문이고, 동문은 국왕을 비롯한 제례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이며, 서문은 악공이 출입하는 문이라 합니다. 종묘 정전 앞마당격인 하월대는 평지보다 높게 월대를 쌓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종묘의 정전(正殿)은 역대 국왕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현재 종묘에는19위의 왕의 신위가 모셔져 있으며 신실 한 칸에는 한분의 왕과 그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국가에 큰 업적을 남긴 왕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고 정의되어 있지만 그것은 조선중기에 정리가 되어서 업적이 적은 왕과 왕비의 신전은 양녕전으로 옮겨졌으나 조선후기 국왕들은 정전에 그대로 모셔져 있습니다. 단일 건축물(물론 한옥형태)로는 세계적으로 가장 길다고 하는데 신위가 늘어날 때마다 감실을 증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전의 신주를 모신 신실입니다. 신실의 판문은 제례가 있을 때만 열리며 판문 앞의 툇간에 제상이 차려집니다. 판문 사이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이것은 조상의 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하고, 습도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종묘에서 제례의 주요 공간이 되는 동월랑입니다. 기둥과 지붕으로만 구성되어 북쪽을 제외한 세방향이 트여 있습니다. 정전 동문에서 제관이 향축·폐와 제물을 가지고 제례를 준비하기 위해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놓여져 있습니다.

창고로 쓰이는 서월랑입니다. 사방이 막힌 건물입니다.


종묘 정전 남문을 들어서면 하월대 아래로 동쪽편에선 역대 국왕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공신당이 자리잡고 있고, 서쪽에는 작은 건물로 토속신앙과 관련된 일곱신을 모신 칠사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종묘의 공신당에 모신 분들을 보면 초기 공신들은 엄선해서 선정되었는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분들이지만, 후대로 내려오면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공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종묘에는 2개의 악공청이 있으며, 정전과 양녕전 서쪽편에 하나씩 자리잡고 있습니다. 악공청은 종묘제례 기간동안 악공들이 쉬거나 연주를 준비하는 장소로 악공들은 서문을 통해서 정전과 양녕전을 드나듭니다.


영녕전은 정전과 더불어 종묘의 중심이 되는 영역입니다. 전체적으로 영녕전도 잘 설계되어서 웅장한 멋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의도적으로 정전에 비해서 모든면에서 한단계 격이 낮게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지붕은 가운데 부분은 높게, 좌우는 한 단계 낮계 만든 것이 정전과 다른 특징으로 보입니다. 조선 중기 이전의 국왕들이 대부분 정전에서 옮겨 온 것으로 보이는데 시기가 지나 옮겨진 34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습니다.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묘제례와 음악·춤의 원형이 잘 계승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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