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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우저서원(牛渚書院), 전형적인 경기지역 서원

younghwan 2012. 4. 23.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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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권 지역에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서원이 김포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자 유학자인 중봉 조헌 선생을 모시고 있는 김포 시내에 자리잡고 있는 우저서원이다. 우저서원은 낮은 야산 아래에 한강과 김포평야지대를 바라보고 있는 고풍스러운 서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저서원은 수도권에 소재한 서원이라서 그런지 고종때 서원 철폐령에 의해 제외되었던 서원 중의 하나이고, 규모도 지방의 서원에 비해서는 크지 않다. 우저서원은 조헌선생을 모신 사당과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 동.서재로만 이루어져 있다.

 조헌은 김포출신으로 조선중기의 유학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크게 활약한 의병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명종대에 급제하여 전라도사, 통진현감, 보은현감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에 물러난 뒤로는 충청도 옥천군에 들어가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에 힘쓰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상소을 올려 왜적에 대비하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기 하였다. 이후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려던 왜군과 맞서 금산에서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 전사하였다. 700의총으로 잘 알려져 있는 금산전투는 왜군과 싸워 대부분이 전사하기는 했지만 왜군의 호남지역 진격을 늦춤으로써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데 큰 공헌을 한 전투이다. 조헌은 의병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이의 학풍을 계승한 대표적인 기호학파 학자로 당대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으며, 이 곳 우저서원을 비롯하여 금산의 성곡서원, 옥천의 포충사 등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경기도 김포시에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수도권의 서원인 우저서원 전경. 조선중기 의병장이자 학자인 조헌 선생을 모신 대표적인 서원으로 구한말 서원철폐령에 따라 제외된 서원 중에 하나이다. 이 서원의 규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도권에 소재한 사찰, 서원 등은 규제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규모가 대부분 크지 않다.


우저서원은 앞쪽에 강당인 여택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고, 뒷편에 사당이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으며, 이외에는 별도의 건물을 두고 있지 않다. 우저서원이 세워진 이곳은 조헌선생이 살던 집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김포 우저서원 입구 외삼문. 외삼문을 들어서면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과 기숙사인 동.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의 건물은 순조때 새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언덕에 자리바고 있는 강당 건물이 바로 보인다. 강당과 동.서재가 있는 마당은 그리 넓지 않은 편이다.


우저서원 강당건물인 여택당.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는 형태로 건물의 높이가 낮으며, 규모 또한 작아 보인다.


우저서원 강당


강당인 여택 앞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동.서재 건물은 각각 앞면 3칸, 옆면 1칸반에 툇마루가 있는 구조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건물규모에 비해서 크게 지붕을 크고 웅장하게 올려 놓고 있다.

강당 뒷편에는 조선 선생을 모신 사당 출입문인 내삼문과 조헌선생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우저서원은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고, 건물또한 웅장하게 짓지는 않았지만, 언덕을 적절히 활용하여 출입문, 강당, 사당을 배치하여 전체적으로는 서원 중에서는 상당히 웅장하게 느껴진다.


내삼문 앞 서쪽편에 있는 조헌선생 추모비.

조헌선행 유허 추모비
조헌(1544~1592년) 선생은 학자이며 의병장으로 자는 여식, 호는 중봉이다. 선생은 조응지의 아들로 부모에 대한 효성은 어려서부터 지극했다. 명종 22년(1567)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주교수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시정에 있어서도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상소하곤 하였다. 선조 24년(1591)에 일본사신이 오자 상소를 올려 국방력을 강화하여 왜적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하여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던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어 홍성, 전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이 진을 치고 있는 금산으로 향하였다. 이때 호남순찰사 권율 장군과 합세하기로 하였는데 서로 어긋나게 되자 단독으로 의병 70여명을 거느리고 금산을 공격했으나 세부족으로 전원이 전사하였다. 선생의 뜨거운 구국활동은 임진왜란 끝난 후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와 함게 임진 사충신의 하나로 포장되었다. 그 후 영조 30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출처:김포시청>


조헌선생을 모신 사당. 우저서원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건물이다.


사당 옆에서 내려다 본 우저서원


우저서원을 지키고 서 있는 고목들. 이 곳에 서원을 세울 때 심어진 것으로 보이는 수령 수백년의 고목들이다.


우저서원 뒷편 언덕에서 내려다 본 김포평야. 지금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서원을 관리하는 고직사 건물. 그리 오래된 건물은 아닌 듯 하다.


김포 우저서원 전경


서원 앞에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연못

우저서원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이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중봉 조헌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26년(1468)에 건립한 서원으로 숙종 원년(1675)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조헌은 명종 22년(1576)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사, 통진현감, 보은현감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 왕조의 개혁을 요구하는 지부상소를 올렸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 홍성, 청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청주성 탈환에 큰 공로를 세우기도 하였다. 특히 왜군들이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하여 금산을 공격할 때 평민.천민들과 함께 왜적을 막아내고 전사하였다. 지금도 그 전적지에는 700의사총이 남아 있어 조헌의 애국심을 엿보게 한다. 선조 37년(1604) 이조판서에, 다시 영조 30년(175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렬동이다. 이 서원은 강당과 사당만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소규모 사원이다. <출처:김포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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