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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_종묘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노안당(老安堂), 구한말 정치의 중심 사랑방

younghwan 2011. 11. 29.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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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현궁 사랑채인 노안당으로 대원군이 직접 이름을 짓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현판을 달고 있는 건물이다. 이 곳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일상에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노자를 안지'하며 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노안당 건물은 구한말 당시에 유행했던 사랑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기거했던 건물임에도 일반 한옥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으며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우리나라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遮陽)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다.
 


구한말 정치의 중심지로 흥선대원군이 기거했던 운현궁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전통 한옥의 사랑채를 확장해서 구한말 한옥의 특징인 정자와 같은 누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노안당(老安堂)은 '노자를 안지'하며에서 딴 이름으로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원래 있던 현판에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지금의 것은 최근에 모각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운현궁 사랑채인 노안당은 정면6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구한말 고위층 저택의 사랑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운데 2칸은 온돌방, 양쪽으로는 대청마루로 되어 있다.


앞면과 옆면에 툇마루를 두고 있다.


건물을 지은지가 그래 오래되지 않은 편을 주춧돌아 아직도 깨끗한 편이다. 왼쪽편 툇마루에는 난간을 두고 있다.


건물 기두에 달아 놓은 주련


노안당 대청마루에는 흥선대원군이 난을 그리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난을 그리고 있는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친척인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웠고, 묵란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추사는 그의 묵란을 가리켜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평상시 복식을 하고 추사의 글로 만든 병풍 앞에서 묵란을 그리고 있다. <출처:서울시청>


가운데 온돌방 2칸에는 고종을 왕으로 정하는 교서를 받는 의식인 봉사식을 재현해 놓고 있다.

봉사식
봉사식은 흥선대원군의 아들을 왕으로 정하는 교서를 받는 의식으로 영의정과 도승지가 참여한 가운데 치러졌다. 고종은 복건에 청도포를 입고 백사대를 착용하였다. 흥선대원군은 흑단령을, 영의정 김좌근은 조복을, 도승지 민치상은 청단령을 착용하였다. <출처:서울시청>


오른쪽으로 길게 누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누마루 내부는 꽤 넓은 편으로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모임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주춧돌. 일반 누마루와는 달리 벽돌로 내부를 막아 놓고 있다.


운현궁 노안당을 뒷편에서 본 모습.


온돌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 윗쪽으로는 책 등을 보관하는 다락이 있다.


노안당의 행랑채처럼 보이는 건물로 흥선대원군을 위해서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이나 흥선대원군을 호위하던 사람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행랑채 내부에는 대원군을 호위하던 천하장안이라 불리던 사람 중 천희연이란 사람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천하장안
천하장안은 흥선대원군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로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 등 네명의 성을 따서 천하장안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개인 경호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천하장안 중 한명인  천희연이 창의 위에 청색 호의를 착용하였다. <출처:서울시청>


운현궁 마당에서 본 노안당 행랑채



운현궁 노안당을 출입하는 솟을대문으로 지어진 출입문.


안채인 노락당으로 연결되는 출입문.



운현궁에서 사랑채로 쓰였던 노안당은 대원군의 일상 거처였으며 파격적인 인사정책, 중앙관제복구, 서원철폐, 복식개혁 등 국가 주요 정책을 논의했던 곳이다. 전형적인 우리나라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오늘날 이 곳에만 남아 있는 특징이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노자를 안지하며'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말년에는 정권에서의 퇴진과 청나라에 납치되는 등 이 곳에서 7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현재 노안당에 게시된 편액은 2006년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중요 무형문화재 제106호 오옥진 각자장에 의해 모각되어 게시된 편액이며, 원 편액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출처: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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