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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김제 모악산 금산사] 석련대, 노주

younghwan 2009. 12. 2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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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사 중심불전인 대적광전 앞마당 좌우에 위치한 석련대와 노주이다. 석련대는 불상을 올려놓는 탑으로 석조연화대좌라 불리며, 노주 또한 불상을 얹는 대좌처럼보이만 실제로 그 용도를 알 수 없어 노주라 불린다. 두개의 석물 양식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이나, 그 만든 형태를 보면 고려전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련대와 노주는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석물처럼 보이지만 문화재로서의 독창성과 역사성 등이 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이다.


금산사 대적광전 앞 동쪽편 미륵전 가는 길에 위치한 석련대. 불상을 놓는 받침대로서 규모가 상당히 크고, 새겨진 연꽃무늬가 화려하다.

금산사 석련대 상대부분. 연꽃이 에워싸고 있는 형태이다.

중심불전인 대적정전 앞에 있는 석련대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이다. 연화대좌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형태가 희귀하고 크기도 매우 거대하다.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m쯤 되는 돌단 밑에 있는데, 이곳이 원래 위치인지는 알 수 없다. 한 돌로 조각한 것이지만 여러 개의 돌을 사용한 것처럼 상·중·하의 구성이 정연하다. 상대는 윗면이 평평하며 중앙에 불상의 양발을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구멍이 두 개 있다. 밑면에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이 에워싸고 있으며, 꽃잎 사이에도 작은 잎들이 틈틈이 새겨져 있어 더욱 화려하다. 중대는 육각형으로 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하대는 엎어놓은 연꽃모양이 출렁이는 물결무늬처럼 전면을 채우고 있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사치스러운 조각 및 장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문화재청>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대장전으로 가는 길에 있는 노주. 상대 받침은 연꽃무늬를 하고 있는 불상 받침같은 모양이고, 기단석과 하대를 보면 석등과 비슷한 모습이다. 상륜부는 석탑의 상륜부를 올려놓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용도를 알 수 없어 노주라고 부른다.

누주의 아래받침돌. 석등의 아래받침돌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노주의 중간 받침돌은 직육면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석탑의 몸돌과 비슷하게 생겼다.

노주의 윗받침돌은 연꽂무늬가 있는 불상을 얹어놓는 대좌처럼 보인다. 그런데 위에 올려진 것은 석탑의 상륜부처럼 생겼다.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금산사는 600년대 창건되어 신라 혜공왕 2년(776)에 진표율사가 다시 고쳐 세우면서 큰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고려 전기인 935년에 후백제의 신검이 아버지인 견훤을 유폐시켰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 노주는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대장각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데, 그 이름을 노주(露柱)라고는 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오리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臺座)처럼 보인다. 땅 위에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아래·중간·위받침돌을 순서대로 얹어놓았다. 아래받침돌에는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면을 둘로 나눈 뒤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아래받침돌 윗면과 윗받침돌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는 중간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연꽃잎을 새겼는데, 아래받침돌의 연꽃잎이 넓고 짧은 반면, 윗받침돌의 연꽃잎은 좁고 길쭉하게 표현하였다. 꼭대기에는 석탑과 같은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둥근 받침부분과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가늘고 긴 사잇기둥이 연결하는 형식이다. 절이 창건된 때가 통일신라시대라고는 하지만, 당간지주 외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되는 것이 거의 없다. 이 노주도 받침돌에 새겨진 조각의 양식이나 각 부분의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금산사 중심불전인 대적광전 앞에 있는 노주

금산사 경내 마당에 있는 석련대와 육각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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