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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시대 거란, 여진과의 관계

younghwan 2012. 2. 10.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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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은 고려와 비슷한 시기인 10세기 초에 일어난 북방민족으로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거란은 우리나라 남북국시대의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세력범위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송나라 및 고려와 상당 기간의 투쟁기와 평화시기를 거친 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멸망하였다. 금나라는 거란을 멸망시켰으며, 중국 대륙에 진출하여 북송을 멸망시킨후 상당 기간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다 몽골에 멸망하였다. 거란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국보로 지정된 초조대장경 인쇄본이 있으며, 거란에서 만든 청동거울이 많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나라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로 함경도 지역에 금나라인들이 세운 비석이 있으며, 다양한 도자기들 또한 남아 있다.

거란과의 관계
10세기 초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일어난 거란은 고려가 중국 대륙 중심부의 송과 통교하면서 자신들을 적대하자 고려를 침략해 왔다. (거란의 1차 침입, 고려 성종 12년, 993). 이때 고려는 서희의 활약 속에 송과의 단교를 조건으로 강동 6주(압록강 남쪽의 6주)를 얻는 성과를 거두며 강화하였다. 그런데 국제교여과 군사상 요충지인 강동6주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거란은 11세기 초 두 차례에 걸쳐 다시 고려를 침략해 왔고 고려는 양규.강감찬 등의 활약 속에 이를 격퇴하여 강동6주를 확고한 고려의 영토로 만들었다. 고려인들이 불력으로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전쟁을 끝내고 국교를 맺은 (고려 현종 10년, 1019) 두나라는 약 100년 간 평화롭게 교류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거란군을 물리치려고 새긴 대장경의 인쇄본(초조본 유가사지론 권제32), 국보 272호, 11세기전반, 송성문 기증
우라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가운데 '유가사지론'의 제32권을 당시의 경판으로 인쇄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현종 2년(1011) 거란군이 개경을 침범하자 부처의 가호로 이를 물리치기 위해 새기기 시작하였다. 경竟, 경鏡 등 송나라 태조의 할아버지 이름 경敬자와 발음이 같은 글자는 한 획씩 생략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거란군을 물리치고 강감찬이 세운 탑의 글(흥국사 석탑기 탁본), 고려 현종 12년(1021)
흥국사 석탑에 새긴 탑기를 탁본한 것이다. 흥국사 석탑은 거란군을 물리친 귀주대첩의 주인공 강감찬(948~1031)이 전쟁 2년 뒤인 현종 12년(1021)에 건립한 탑으로, 오래오래 나라가 태평하기를 기원하는 명장 강감찬의 우국충정이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수명장수를 바라는 문자가 새겨진 거란 거울(거란자명 동경), 거란, 개성출토
거란 소자가 새겨진 청동거울(왼쪽)이다. 거울 꼭지를 중심으로 네모난 테두리 안쪽에는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장수복덕"으로 읽히는 거란 문자 네 개가 양각되었다. 같은 문자, 같은 모양의 거울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출토된 곳으로 보아 거란에서 수입되어 실제 개경 주민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거란 소자자 새겨진 청동거울(오른쪽)로, 고려와 거란을 교류를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란 소자는 거란 태조가 직접 만들었다는 거란 대자와 달리 표음적이 요소가 있다. 기억하기가 어려워 일반인보다는 황실의 공문서나 비문 등 제한된 경우에만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남겨진 자료가 적어서 거란 소자의 해독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여진과의 관계
고려 북쪽 변경의 여진족은 초기에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조공을 바치다가 거란이 쇠퇴하던 12세기 초에는 고려를 강력히 위협할 정도로 그 세력을 키웠다. 고려는 숙종.예종 때에 윤관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정벌케 하였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세력을 더욱 키운 여진은 만주 일대를 장악하여 국호를 금이라 하더니(1115), 곧이어 거란을 멸망시키고(1125) 송까지 양쯔강 이남으로 밀어내리며 중국 대륙을 장악하였다(1127). 게다가 금은 과거 자신들이 조공하던 고려에 대해 거꾸로 군신의 예를 요구하였고, 고려는 논란 끝에 이자겸의 현실론을 따라 금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두 나라는 금이 몽골에 멸망하기까지(1234) 평화를 유지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여진을 정벌하여 얻은 땅에 비를 세우는 그림(척경입비도,복제품), 17~18세기,
조선후기에 제작된 '북관유적도첩'에 들어 있는 '척경입비도'이다. 이 그림은 고려 예종 2년(1107)에 윤관과 오연총이 지금의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한 뒤 길주.공험진 등 9성을 쌓고 선춘령에 "고려지경"이라고 새긴 비를 세워 경계를 삼은 일을 그린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백자 꽃 넝쿨무늬 대접, 백자 파도 물고기 무늬 사발 - 개성출토 금나라 도자기들


백자흑화 모란.넝쿨무늬 병 - 개성출토 금나라 도자기들


금나라 사람들이 함경도 경원에 세운 비(경원 여진자비), 1156년 추정, 경원군 동원면 화동 절터 출토
함경도 경원 지방에 중국 금나라 사람들이 세운 비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여진 문자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다. 이 지역 오롱초사라는 절의 건립 및 불상 제작 과정, 시주자 등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여진 문자와 여진 인명, 지명, 관명 및 어휘와 형태소들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비석에 새겨진 여진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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