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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남산골 한옥마을,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younghwan 2011. 4. 4.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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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겨 놓은 5채의 서울 지역 전통 한옥 중 하나로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이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여했던 당대 최고의 목수가 지은 저택이라서 저택의 이름에 집주인이 아닌 집을 만든 건축가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현재는 안채, 사랑채와 중문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문간채, 앞뒤 행랑채, 사랑뒤채 등 모두 8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주택이다.

 원래 이 저택은 구한말 경주이씨 집안에서 거주했던 서울 지역 양반가옥이지만, 전통적인 한옥의 구조와는 약간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당대 최고의 목수였던 이승업이 집주인의 입맞에 맞추어 적절히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몸채에 날개채가 붙은 '丁'자형과 'ㄴ'자형을 이루고 있다. 대청마루가 있는 안채에는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고 있어 정자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다. 보통 일반적인 한옥에서는 사랑채에 누마루 형태의 방을 두는데 이 집은 안채에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집의 사랑채는 앞편 3칸 규모로 별로 크지 않다. 이집은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낮은 담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가옥 전체를 보여주니는 못하지만, 구한말 최고의 건축가가 지은 한옥으로서 의의가 있는 저택으로 생각된다.

 


이 가옥의 안채는 앞에서 보면 'ㄴ'자형으로 생겼지만, 전체적으로는 '丁'형태이다. 몸채에 해당하는 대청마루와 건너방은 높은 기단위에 세우고, 부엌과 안방은 낮은 기단위에 세워 놓고 있다. 지붕의 높이 또한 달리하고 있다.


이 저택의 주인이 생활하던 공간으로 보이는 건너방은 그 형태가 사랑방처럼 생겼으며 주위에는 난간이 있는 툇마루로 둘러져 있다. 난간은 구한말에 크게 유행했던 양식으로 보인다.


건너방은 2칸 규모로 큰 방인데, 지금은 가구가 놓여 있지 않아서 더 넓어 보인다.


난간이 있는 툇마루는 방 주위와 대청마루 뒷편까지 연결되어 있다.


날렵하게 만들어졌으며 사방이 뚫려 있어서 누마루처럼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너방과 함께 사랑채의 몸채를 이루고 있는 대청마루에는 우물마루를 깔아 놓고 있다. 가족간의 모임이나 집안 행사를 위해서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으며, 지금은 옛날 가구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대청마루의 문을 걸을 수 있는 일명 '돼지코'라고 불리는 문걸이


안채 부엌은 2칸규모의 상당히 큰 부엌이다.

 

부엌에서 대청마루로 음식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작은 창문을 볼 수 있다.


부엌 내부의 모습. 아궁이가 3개 있고, 아궁이 위로 책들을 보관하는 다락방이 있다. 아마도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아궁이 위에 다락방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뒷쪽편에서 본 안채. 안방과 사랑방으로 쓰였을 건넌 방에 굴뚝이 연결되어 있다.


'ㄴ'자형으로 생긴 사랑채. 자료에는 사랑채라고 설명되어 있으나, 그 구조로 봐서는 별채 건물로 여겨진다. 기존 한옥 양식과 다른 이 집만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집 사랑채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크지 않은 편이며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손님을 맞는 사랑채의 특징이 잘 보이지 않고 있다.


사랑채 앞쪽으로 달아 내어 놓은 툇마루


가구가 놓여 있는 사랑채 한쪽편 방. 1칸반 정도 크기의 방이다.






사랑채 뒷쪽으로 날개형태로 달아 놓은 건물에는 별도의 부엌이 있다. 아마도 사랑채라기 보다는 아들 내외가 거주하는 별채 건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뒷쪽에서 보면 날개가 달린 'ㄴ'자형 주택임을 알 수 있다.


사랑채에 연결된 굴뚝


건물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


마당 한쪽편에 있는 장독대. 실제 양반 저택의 장독대는 대부분 상당히 규모가 큰편이며, 현재의 장독대는 그냥 장식의 의미로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전경


뒷쪽편 언덕길에서 내려다 본 전경


 이 집은 1860년대에 경복궁 중건공사에 참여했던 도편수 이승업이 지은 것이다. 원래 이 집은 청계천 부근의 중구 삼각동에 있었다. 1889년 이후 경주이씨 집안이 이 집에 거주하였으며, 1970년부터는 조흥은행의 사료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남산골 한옥마을이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안채, 사랑채와 중문만이 남아 있지만, 원래 이 집은 문간채, 앞뒤 행랑채, 사랑뒤채 등 모두 8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큰 주택이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몸채와 그에 직각으로 붙어 있는날개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몸채가 더 크고 두터우며 지붕도 더 높고 웅장하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낮은 담이 있어 남녀의 공간을 구분하였으며, 사랑채 부엌의 문도 안채 쪽으로 나 있어 사랑채 영역과 나뉘었다. 이 집은 조선 후기 서울의 주거문화와 당시의 건축기술을 잘 보여 준다. 또한 각 공간의 중요도에 따라 지붕의 높낮이와 모양을 달리하는 세련된 솜씨를 보여 주며, 안채의 곳곳에 설치된 난간과 툇마루는 편리하면서도 아름답다. <출처: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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