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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남산골 한옥마을, 관훈동 민씨가옥 안채

younghwan 2011. 4. 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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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골 한옥마을에 있는 5채의 전통 한옥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민영휘 가옥이다. 이 가옥은 구한말 부마도위 박영호 가옥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구한말 민씨 일족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친일파인 민영휘의 가옥인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민영휘는 명성황후와는 먼 친척이지만 여흥민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관직생활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탐관오리 중 한명으로 오랜 기간동안 백성들로부터 지탄을 받아 임오군란때에는 그의 집이 부서지는 사고를 입기도 하고 갑오경장때에는 탐관오리로 논죄되어 유배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수탈한 재물을 불려서 당시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휘문고등학교와 풍문여고의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친일행위자로 분류되어 2007년 국가로 환수되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남산골한옥마을에 있는 이 가옥은 4천여평의 부지에 있는 민영휘 일가의 저택 중 남아 있었던 안채와 중문채, 그리고 복원한 건물인 사랑채와 별당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안채는 마지막까지 원형이 남아 있었던 건물로 구한말 민영휘 일가의 세상을 대하는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조선시대 민간 가옥은 정부의 규제를 받았기때문에 건물을 크게 지을 수 없었으나, 이 가옥은 구한말 혼란기를 틈타서 궁궐 전각에 버금가는 규모로 화려하게 지었다. 안채는 'ㄱ'자형 배치를 하고 있는데, 부엌이 6칸이나 되고, 대청마루는 그 넓이가 웬만한 관청 건물의 대청마루보다 넓어 보인다. 구한말 관직을 통해서 치부했던 인물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저택이다. 저택에서는 일반적인 한옥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함이나 단아함을 볼 수 없고, 궁궐 전각을 넘어서는 화려함과 웅장함을 꿈꾸었던 그들의 탐욕을 보여주고 있는 주택이다.


서울 관훈동에 있었던 구한말 친일파 인사인 민영휘 저택의 안채. 'ㄱ'자형으로 배채된 이 건물은 일반 한옥과는 달리 폭이 2칸씩이기때문에 내부공간은 상당히 넓은 편이다.


부엌 옆으로 있는 앞면 3칸의 안방. 기준이 되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하는 칸의 넓이 또한 상당히 넓다.


안방 내부의 모습. 이집 안주인이 거처하던 방이다. 이집 안주인이 서울 풍문여고를 설립자라고 한다.



상당히 넓어 보이는 안방앞 툇마루. 이 저택 안채는 건물 주위를 툇마루로 둘렀기때문에 내부공간이 상당히 넓다.


안방 문을 열면 연결되어 있는데, 연결된 안방이 3칸이고 가운데 2칸의 마루가 별도로 있고, 모서리에 앞면 2칸 정도의 큰 방이 있다.


안방 뒷쪽편 툇마루와 굴뚝.


안주인이 사용하던 사랑방처럼 생긴 건넌방과 대청마루.


안채 가운데에는 집안 행사를 하던 공간으로 생각되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다. 앞면 3칸 규모로 분합문이 있어서 시원한 느낌을 주는 이 대청마루는 웬만한 고을의 동헌보다도 넓어 보인다.


원래 한칸의 폭이 넓은데다가 똑마루까지 더해서 전체적으로 10칸이 넘는 큰 대청마루이다.


대청마루 양쪽의 방까지 합쳐서 보면 상당히 넓은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안주인이 손님을 맞는 공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건넌방. 방자체가 넓은데 사방에 넓은 툇마루를 두어 더 넓어 보인다. 당시 유행했던 툇마루 난간을 설치해 놓고 있지는 않다.


대청마루 뒷편 툇마루


대청마루 뒷편의 모습


6칸 규모의 엄청나게 큰 부엌이 안방 바로 옆에 있다. 부엌에는 당시 상류층에서 많이 사용했던 생활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상류층에서 부의 상징으로 여겼던 다양한 크기의 소반


술을 담가두었던 술통과 술을 증류하던 항아리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에서는 손님접대를 위해서 술을 준비하는 것이 상당히 큰 일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술을 증류하던 항아리


아궁이에 불을 때던 환풍기와 맷돌


현재 전시되어 있는 부엌의 모습은 실제보다는 많이 생략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엌 옆에 있는 중문간채에는 식사를 준비하던 하인들이 머물던 방으로 보인다.


문간채 방 내부. 식사준비와 관련된 가구와 물품들이 보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엌 뒤쪽으로도 출입문과 문간채가 있는데, 광으로 쓰였던 것 같다.


광 내부에는 각종 생활 용구들이 있다.


장독대, 우물 등이 있는 안채 뒷마당.


뒷마당 장독대


안채 뒷편에는 앞면 3칸 규모의 작은 별채가 있다. 아마도 결혼한 아들이 잠깐동안 사는 공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별채는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두고 있는 '-'집 구조이다.


별채 내부


옆에서 본 별채


안채와 별채 사이의 마당.


이 저택 출입문이 중문.


뒷쪽에서 본 안채의 모습

관훈동 민씨 가옥
이 집은 민영휘 저택 가운데 일부였다. 그는 관훈동 일대 너른 따에다 집을 여려 채 짓고 일가붙이와 함께 살았는데, 옛 터의 위치는 주로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였다. 원래 집터에는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별당채와 대문간채, 행랑채 같은 집채가 있었다고 전하나 나중에 소유자가 바뀌면서 안채와 여기에 연결된 중문간채만 남기고 모두 헐려졌다.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할 때 남아 있던 안채를 옮겨 지으면서 철거되었던 건넌방 쪽을 되살렸고, 사랑채와 별당채를 새로 지었다. 전체배치는 사랑채 뒤로 안채와 별당채를 구성하였으며, 담과 문으로 적절하게 공간을 나눴다. 보통 서울지방 안채는안방 앞쪽에 부엌을 둬서 'ㄱ'자형으로 꺽어 배치하는 편인데, 이 집은 드물게 부엌과 안방을 나라하게 놓았다. 이 밖에도 고주 두개를 세워 짠 넓고 큰 목조구조와 6칸에 달하는 부엌의 규모, 그리고 마루 밑에 뚤려 있는 벽돌 통기구 등은 당시 일반 가옥과 다른 최상류층 주택의 면화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출처: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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