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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포천 인평대군 묘 및 신도비, 치제문비

younghwan 2011. 5. 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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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에 위치하고 있는 인조의 셋째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묘이다. 인평대군은 병자호란 후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갔다고 돌아왔으며, 효종때에는 4차에 걸쳐서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병자호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헌신을 한 인물이다. 왕자의 신분이지만 묘역은 규모있게 잘 정비되어 있고, 지금까지도 묘역에 재실과 관리인이 남아 있다.  서예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학문도 깊었다.

묘역 앞쪽에는 거북이수에 몸돌을 올려놓은 잘 만들어진 신도비가 있고, 옆쪽 비각에는 효종,숙종,영조,정조.순조의 글씨가 새겨진 치제문비가 있다. 그 중 비각안에 있는 치제문비는 2기가 있는데 1기는 효종의 지은 제문과 그 후에 숙종이 직접 짓고 쓴 제문이 새겨져 있다. 또한 다른 한쪽은 정조때 영조.정조의 것을 먼저 새긴후 나중에 순조의 글씨를 적은 비석이 있다.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병자호란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그의 공이 후대 왕들에게 많은 감명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인평대군 묘.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왕자의 능이지만 격식을 갖추어 잘 꾸며져 있다.


봉분 앞에 있는 묘비


상석과 향주석


장명등


망주석


동자석


문인석. 왕릉이 아니라서 그런지 무인석은 세워져 있지 않다.


내용을 알 수 없는 거북 이수.


묘역에서 내려다 본 포천군 신북면 일대


인평대군 묘역


묘역 입구에는 거북이수에 세워진 신도비를 볼 수 있다. 조선후기에 많든 비석 중에는 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신도비는 승려들의 탑비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신도비 몸돌에는 그의 일생에 대해서 기록해 놓고 있다. 글씨가 오래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주 선명하다.


용과 구름이 새겨진 머릿돌. 중국 북경에 있는 많은 비석들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옆에서 본 거북이수


신도비와 치제문비가 있는 비각

인평대군 묘 및 신도비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 이요(1622∼1658)의 묘이다. 인평대군은 인조 18년(1640) 볼모(국가간에 침략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왕자를 그 나라에 맡기는 일)로 중국 심양(지금의 북경)에 갔었으며, 돌아온 이후에도 인조 28년부터 4차례나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왕자의 신분으로 병자호란 후 국난 극복에 헌신하였다. 묘는 부인 오씨와의 합장묘이다. 주위에 낮은 돌담을 둘렀으며, 봉분 아랫부분에는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로는 문인석·망주석·동자상이 각 1쌍씩 서 있다.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는 325㎝나 되는 큰 규모이며 비석의 조각장식이 섬세하고 정교하다. 묘역 아래에는 효종·숙종·영조·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쓴 2기의 비석이 있는데 인평대군의 업적을 예찬한 내용이다. <출처:문화재청>



인평대군을 위해서 효종,숙종,영조,정조,순조의 글씨로 제문을 새겨놓은 비석 2기가 나란히 있다. 다섯왕이 제문을 쓸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평대군 치제문비

인평대군 치제문비
인평대군(1622∼1658)의 묘 왼쪽에 지어진 한 채의 비각안에 2기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치제문이란 공신이나 왕족이 죽은 후 제사지낼 때 임금이 친히 지어 내리는 제문(祭文)으로, 이 비들은 모두 인평대군을 위해 지어진 제문을 새겨 놓았다. 인평대군은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아우로, 여러 차례 청나라를 오가며 나라를 위해 힘쓰다 3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학문에도 능하고, 글과 그림에도 뛰어나 현재까지도 그의 몇 작품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2기의 비 중 하나는 경기도 광주에 있던 인평대군의 묘를 이 곳으로 옮길 때 효종이 지은 제문과 그 후 숙종이 직접 짓고 쓴 제문을 새겨놓았다. 또한 비의 끝부분에는 숙종 때에 비석을 갖추긴 하였으나 세우지 못하다가, 경종 때에 이르러서야 서평군 이요의 글씨로 비의 명칭을 더하여 비를 세웠다는 사실을 추가로 적어 놓았다. 앞면에 새긴 효종의 글씨는 그의 편지글을 모아서 하나씩 본뜬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영조·정조·순조가 직접 짓고 쓴 제문을 새긴 비로, 앞면을 세 등분하여 각각 영조·정조·순조의 제문을 배치하였다. 정조 때에 영조·정조의 것을 먼저 새겨 비를 세운 뒤, 후에 순조의 것을 실은 것이다. 2기 모두 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고 있으며, 지붕돌에 새긴 조각외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는 간결한 구조이다. 앞의 것은 경종 4년(1724)에 세웠고, 나중 것은 정조 16년(1792)에 세운 것으로, 다섯 임금의 어필(御筆)을 함께 볼 수 있어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출처:문화재청>


묘역 입구에는 묘를 관리하기 위한 재실과 관리인의 살림집이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관청건물처럼 지은 재실.


재실 앞쪽으로는 이 묘역을 관리하는 관리인의 살림집이 있다. 살림집은 'ㄱ'자형의 한옥건물이다.


재실 살림집


인평대군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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