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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France)

[프랑스여행] 아비뇽 교황청, 중세시대 교황이 잠시 머물렀던 '아비뇽유수'의 현장

younghwan 2011. 7. 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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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뇽(Avignon)은 프랑남부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오래된 도시로 14~15세기 동안 교황이 있었던 아비뇽교황청이 도시 북쪽편 론강변에 있다. 아비뇽은 고대 켈트족의 요새인 오피돔 아베니오에서 기원하고 있으며, 여러민족이 이 도시를 점령했으며 십자군전쟁 이후 프랑스 왕가의 속령으로 존속해 왔다고 한다. 아비뇽교황청은 13세기 로마카톨릭 교황청이 이 곳 아비뇽으로 옮겨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머문 시기를 말하며, 고대 유대인의 '바빌론유수'에 빗대어 '아비뇽유수'라고 비꼬아서 부른다.


 아비뇽교황청은 로마교황청과는 달리 아주 견고하고 규모가 큰 중세 성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비뇽은 5 km 에 이르는 외성이 있고, 도심 북쪽편 론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내성 형태의 아비뇽 교황청이다. 현재 남아 있는 중세 유럽의 성채 가운데 최대 규모인 이 교황청은 교회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중세 성곽의 모습을 잘 보유주고 있다. 아비뇽 교황청 옆으로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성당이 있는데, 2명의 교황이 이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아비뇽교황청은 교회 건물이라기 보다는 중세 성곽에 가까운 건물이다. 가공한 석재로 쌓아 올린 아주 높은 성벽 안에 교황청이 자리잡고 있다.



아비뇽교황청 출입문이 있는 성벽. 이 건물에는 창문이 그리 많지 않으며, 원래부터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교회를 상징하는 성상이나, 성물 등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아비뇽교황청 북쪽편에는 프로방스 지방을 흐르는 론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크고 견고한 망루가 있다. 중세 유럽 성곽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남쪽편으로는 일반적인 교회 건물과 비슷하지만, 성채의 기능이 강조되어 건물외벽이라기 보다는 성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비뇽 교황청 출입문.


아비뇽 교황청 출입문 위에는 장식이라고 할 수 있는 뾰쪽한 첨탑이 세워져 있다.


출입문 위에 새겨진 문장. 아마도 아비뇽교황청 문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비뇽 교황청을 들어서면 중정형식의 큰 마당이 있고, 사방에 높은 방들이 있는 높은 성벽 기능을 하는 건물들이 있다.


아비뇽 교황청은 내부에도 창문을 많이 두고 있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견고한 성벽들만이 보이는 약간 어두운 분위기의 건물 구조를 하고 있다. 중세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곳에 교황한 거주한 시기를 '아비뇽 유수'라고 하는데 건물 전체에서 감금되었다는 분위기가 나고 있다.


아비뇽 교황청 줄입문 계단. 건물내부에는 수 많은 회랑과 연결통로가 있으며, 마당은 출입통로의 역할을 별로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건물 지하에도 많은 방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마당 한쪽에 환기구로 보이는 시설이 있다.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


마당주위로는 통로 기능을 하는 회랑들이 있으며, 마당 방향으로 개방된 곳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마당에서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


홀로 사용되는 곳에는 큰 창문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

 


출입문이나 창문을 거의 보기 힘든 곳도 있다.

 


마당에서 건물로 들어가는 출입문.


아비뇽 교황청은 2개의 마당을 두고 있는데, 남쪽편에는 출입문도 많지 않고 높은 성벽으로 둘러져 있어서 어두운 중세시대의 분위기를 주고 있는데 반해서 북쪽편은 창문도 많고 넓은 회랑도 있어서 아비뇽 교황청 인사들이 주로 거처했던 지역으로 보인다.


마당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이 공간 내에서는 개방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 1층과 2층에 통로로 이용되는 넓은 회랑이 있으며, 회랑에서 마당을 내려다 볼 수 있다.


통로로 사용되는 건물 2층의 회랑. 마당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벤치가 설치되어 있다.


이 공간은 높은 망루와 성벽으로 보호 받고 있으며, 성벽 위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의 형태로 봐서는 성벽 위에 병사들이 이동하거는 근무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보인다. 원래 있었던 것이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아비뇽 교황청 출구는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편 출입문에서 올려다 본 높은 성벽과 망루



아비뇽 교황청 바깥쪽에 있는 부속건물이 있었던 자리.



동쪽편에서 본 아비뇽 교황청



아비뇽교황청의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론강에 세워진 아비뇽다리에서 본 교황청. 론강변 높은 바위 언덕 위에 견고하게 세운 중세 유럽 성곽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비뇽 교황청 북쪽편에 있는 2명의 교황이 묻혔다는 노트르담 성당. 교황청이 이 곳에 있었지만, 도시의 규모가 크지 않아서 그런지 성당도 그리 크지는 않다.

 


높은 망루와 성벽이 인상적인 북쪽편 성곽. 팔레누보라고 부르며 건축소품돌과 장식물이 많아 화려한 느낌을 준다.

남쪽편 건물은 팔레비외라고 엄숙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주는 중세 성곽이라 할 수 있다. 건물 앞쪽에는 아비뇽 유수를 상징하는 코끼리가 코로 물구나무 서기를 한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아비뇽 교황청 출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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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뇽 유수는 13세기 로마 가톨릭의 교황청의 자리가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겨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머무른 시기를 말한다. 고대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교황의 바빌론 유수라고도 불렸다.1303년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대립이 있던 중에 아나니 사건(프랑스군이 아나니의 별장에 있던 교황을 습격한 사건)이 터져 이후 교황은 프랑스 국왕의 꼭두각시가 되어 갔다. 프랑스인 추기경 베르트랑 드 고트가 교황 클레멘스 5세로 즉위하면서 필리프 4세의 요청에 따라 1308년에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로 이주하였으며 1309년에 아비뇽에 거처를 두었다. 아나니 사건 이후의 처리를 위해 비엔 공의회를 열기 위한 준비를 하던 사이에, 이탈리아 반도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7세의 침략을 받아(1310~1313) 교황은 이탈리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결국 프랑스에 계속 체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아비뇽은 프랑스 왕국의 영내가 아니라 교황의 가신인 프로방스 백작의 영지였다. 아비뇽 유수기에는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며 교황 또한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다. 덧붙여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아비뇽 체재중에 교황 클레멘스 6세로부터 성직 또는 사절의 지위에 임명되었지만, 교황청의 부패상과 교황이 로마를 떠나 있는 것에 대해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에게 종종 로마로의 귀환을 호소하였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아비뇽을 서방의 바빌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대략 70년 후인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드디어 로마로 귀환함으로써 아비뇽 유수기는 종식되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다음해에 선종하였으며, 로마에서 새로 선출된 교황 우르바노 6세가 등극하지만, 머지 않아 프랑스인 추기경들이 콘클라베가 무효라고 선언하고 일방적으로 탈퇴하여 대립 교황을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이 있는 서구 대이교가 일어난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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