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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경주 괘릉 (사적 26호), 신라 왕릉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춘 원성왕의 능

younghwan 2011. 9. 29.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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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괘릉은 신라 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원성왕은 혜공왕 16년에 상대등 김양상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선덕왕 즉위 후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죽자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786년에 당나라에 조공을 하고 유교정치를 지향하여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고 김제 벽골제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선덕왕과 원성왕대에 귀족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그 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왕위를 계승하는 통일신라 후대의 정치 혼란상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한다.

 사적 26호로 지정된 괘릉은 12지신상으로 둘레돌을 돌린 원형봉토분으로 봉토 주위에는 수십개의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했으며, 중앙에는 안상이 조각된 서역풍의 상석이 놓여 있다. 봉분에서 떨어진 왕릉 입구에은 사자 2쌍, 문무인석 각 1쌍, 석화표 1쌍이 서 있다. 괘릉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 신랑왕릉 중에서는 형식적으로 가장 잘 갖추어져 있으며, 십이지상석을 둘레돌에 새겨 넣는 등 신라 특유의 봉분 양식도 잘 반영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 숭복사로 최치원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는 기록과 괘릉 근처에 숭복사터가 있어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인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괘릉은 신라 왕릉 중에서 형식적으로 가장 잘 갖추어져 있는 왕릉으로 후대 왕릉 조성의 표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성왕릉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서 봉분을 조성하고 그 앞에는 문.무인상을 비롯한 석물을 세워놓고 있다. 조선왕릉의 석물이 봉분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에 괘릉은 봉분고 떨어진 왕릉 입구 출입로 양쪽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형적인 면에서 볼 때 이런 배치가 조선왕릉의 석물배치보다 안정감이 있고 뛰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괘릉 입구 서쪽편 석물. 상스러운 동물인 사자 2마리, 문인석, 무인석, 화표석이 나란히 서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이들 석조물은 괘릉 봉토 주위의 12지신상과 더불어 신라 왕릉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인석은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의 얼굴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서역인 얼굴 특징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서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이다.


괘릉 동쪽편에 세워진 석물. 서쪽편과 쌍을 이루고 있다.


괘릉 봉분은 밑둘레 70m, 지름 21.9m, 높이 7.7m로 봉분을 둘레석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난간을 세워 놓고 있다.


봉분 앞에 세워진 제단 성격의 상석은 후대 조선왕릉이나 다른 신라 왕릉과는 다른 큰 규모의 상석이다. 그 형태가 서구의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무인석과 함께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원성왕릉 앞에서 내려다 본 석물들이 세워진 왕릉으로 오르는 길. 석물의 배치나 송림 등이 잘 배치되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조선왕릉보다도 잘 만들어졌으며 시원하고 탁 트인 느낌을 주고 있다. 괘릉은 신라 왕릉 조성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신라 왕릉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구조물로 봉분 바깥족에 화강암 석재로 난간을 설치해 놓고 있다.


봉토 둘레에는 방향에 따라서 이에 해당하는 십이지신상을 새겨놓고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상당히 세밀하고 뛰어나다.


12지신상이 새겨지지 않은 부분.


괘릉 둘레석에 새겨진 12지신상



경주 괘릉 (사적 26호),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
이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785~798,김경신)을 모신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약 12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밑둘레 70m, 지름 21.9m, 높이 7.7m 능의 둘레에 있는 호석에는 십이지신상이 돋을새김되어 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봉분에서 약간 떨어져 좌우에 화표석. 문인선. 무인석과 돌사자를 마주보게 세웠으며,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 모습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 무덤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본받았으나 둘레돌.십이지신상.난간.석물 모든 면에서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조각 수법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괘릉'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을 걸어 묻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왕은 독서술신과라는 제도를 두어 인재를 뽑았으며 벽골제를 고치기도 하였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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