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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경주읍성 (사적 96호), 고려시대 경주 도심에 쌓은 읍성

younghwan 2011. 10. 1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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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읍성은 경주도심부에 있는 석축성으로 축조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려 우왕때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축성된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1012년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읍성은 임진왜란때 파과된 것을 중수했다고 하며 동문인 향일문, 서문인 망미문, 남문이 징례문 북문인 공진문이 있었다고 한다. 남문인 징례문 문루에는 성덕대왕 신종을 걸어놓고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경주의 다른 건축물등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축성에 사용한 돌 중 상당수가 인근 절터 등지에서 가져온 건축자재나 석탑 등의 부자재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읍성 석축 대부분이 헐리고 동쪽편 약 50m의 성벽과 치가 남아 있다.

 신라천년 고도인 경주는 통일신라가 멸망한 고려,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지역 중 하나로 동경유수, 안동도호부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군현제 개편때부터 경주라는 이름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경주는 종2품 외관직인 부윤이 고을 수령으로 있었던 큰 고을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한성과 평양, 경주, 함흥, 전주, 의주, 경기도 광주가 부윤이 수령으로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경주 관아가 설치된 경주읍성은 신라 궁성인 월성 북쪽편으로 신라고분들이 모여 있었떤 대릉원 북쪽편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 관아를 구성했던 건물들은 대부분 헐리거나 변형이 심하게 되어 현재는 그 흔적을 찾기는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약 50여미터 정도만 남아 있는 경주읍성 동쪽편 석축. 석축의 자래로 옛 절터의 석자재들을 많이 사용하여, 최근에 읍성 석축 전체를 해체수리하였다고 한다.


읍성 바깥쪽에 진열해 놓은 옛 절터의 석재들. 이 들 석재들이 읍성 석축을 쌓을때 사용했다고 한다.


읍성에 설치했던 방어시설 중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치.


중간크기에 돌을 사용한 석축과는 달리 치를 받치는 아래쪽 석축은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쌓아서 아주 견고해 보인다.


안쪽에서 본 치


잘 다듬은 석재를 쌓아서 만든 석축. 이 석축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중수된 것이라고 하는데, 보은의 삼년산성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신라의 축성방법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후이지만 옛 기술들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일정한 크기의 석재들을 아주 촘촘하게 쌓았는데, 중간정도 크기의 돌로 쌓은 신라 산성의 모습이 남아 있다.


읍성 내부에서 본 석축. 안쪽으로는 토축을 쌓은 부분도 있지만, 석축 위쪽으로는 잘 다듬은 석재로 쌓은 석성의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서 쌓은 읍성 내부의 석축


아래족에 절단된 부분인지, 문루가 있었던 곳이지 잘 구분이 되지는 않지만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이 끝나는 부분. 바깥쪽으로 돌출된 것으로 보아서 방어시설이 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남족편 관아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지역에는 오래된 고목들이 남아 있다.


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곳에 오래된 고목이 남아 있다.


경주읍성 전경


경주읍성 남문인 징례문 문루에 걸려 있었으면서 시간을 알려주었던 성덕대왕신종. 지금은 경주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경주읍성 (사적 96호), 경주시 북부동 1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경주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지방통치의 중심지였다. 주로 중심이 되는 지방도시에 읍성을 쌓았으므로 경주에 읍성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경통지』에 고려 우왕 4년(1378)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처음 이 성이 만들어진 것은 그 이전의 일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지금의 읍성은 조선 전기에 다시 짓고,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10년(1632)에 동·서·북문을 만들면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규모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둘레가 약 1.2㎞, 높이가 약 4m 정도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어 그 문을 통해 출입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도시계획으로 경주시가 확장되면서 성이 대부분 헐리고 현재는 동쪽 성벽 약 50m 정도만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4문 가운데 남문인 징례문에 걸려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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