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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미술관] 황룡사지 출토 기와와 전

younghwan 2011. 11. 8.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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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는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규모나 위상에 있어서 신라 최고의 사찰이었다. 황룡사는 진흥황 14년(553)에 월성 동쪽 지금의 구황동에 짓기 시작하여 17년만에 완성한 사찰이다. 현재 남아 있는 절터의 면적은 약 2만5ㅍ천여평에 달하며, 절터에는 당시 건물이 들어섰던 초석이나 불상이 있었던 석불대좌 등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사찰의 가람배치는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일열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황룡사에는 신라 삼보 중 장륙존상과 경주의 랜드마크가 되었던 구층목탑이 있었고, 화가 솔거가 그린 금당벽화도 있었다. 또한 원효대사가 이 곳 황룡사 강당에서 강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 진흥왕때 처음 세워진 황룡사는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려 고종 23년(1298)에 몽고군에 의해서 불에 타서 없어질 때까지 계속 존재해 왔다. 황룡사 절터에서는 약 4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 3만여점이 기와이며, 그 종류와 만든 시기도 매우 다양하여 황룡사 사찰 건물들은 오랜 기간동안 수차례의 중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룡사 절터에는 출토된 기와들 중에는 대형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용마루 끝에 올려지는 거대한 치미를 비롯하여 연꽃무늬, 용무늬 등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한 기와들을 볼 수 있다.

황룡사
국립경주박물관 북쪽에는 옛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황룡사입니다. 진흥왕 14년(553)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완성된 신라에서 으뜸가는 절이었던 황룡사. 왜 황룡사라고 부르게 되었을까요? 진흥왕 때 새로운 궁궐을 월성 동쪽에 지으려 하였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을 짓고 황룡사라고 하였답니다. 이 곳 황룡사에는 신라의 세가지 보물 가운데 두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흥왕 35년(574) 금당에 안치한 금동장륙존상과 선덕여왕 14년 (645) 자장의 권유로 세우기 시작한 구층목탑입니다. 그 높이가 무려 480cm 정도나 되었으니까요. 현재 남아 있는 신라 금동불 가운데 가장 큰 백률사 약사불이 180cm 정도에 지나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볼 때, 당시 황룡사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구층목탑은 신라를 둘러싼 아홉 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적국이던 백제의 아비지를 초빙하여 나무와 돌로 탑을 만들게 하였다는데 그 높이가 무려 225척(약80m)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이 구층목탑은 당시 경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기 때문에 쉽게 벼락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효소왕 7년(698) 벼락 맞은 이래 다섯 차례나 벼락을 맞았다고 합니다. 황룡사는 고려시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안타깝게도 고려 고종 25년 (1238)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망새, 황룡사터 출토, 7세기.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치미는 궁궐의 전각 등 대형 건물에서만 볼 수 있는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건물에서 많이 사용했던 것 같다. 지금은 중국 자금성에서 치미를 사용한 건물을 볼 수 있으며, 일본 최대의 목조건축물인 동대사 금당이 황룡사 금당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망새(치미)에 새겨진 무늬, 옆면과 뒷면에는 연꽃무늬와 얼굴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수염을 새긴것도 볼 수 있다. 기와에 새긴 얼굴에서 현대 미술에서 볼 수 있는 간략하면서도 상징성 있게 표현을 볼 수 있다.


뒷쪽에서 본 치미

이 기와는 용마루 끝에 올려지는 것으로, 흔히 '치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치미'라는 용어는 그 모양이 올빼미 꼬리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어서 이 기와의 쓰임새나 성격을 잘 대변하는 명칭은 아닙니다. 망새는 마루 끝에 장식하는 기와를 부르는 말이므로 적절한 용어라 여겨집니다. 아시다시피 목조건축물의 가장 무서운 적은 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옛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에방책 가운데 하나가 물의 상징물을 건물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징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용'이었습니다. 용은 옛적에는 '밀'라 불렀는데, '미르'는 '물'의 또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용마루 끝 가장 높은 곳에 달린 이 기와는 화마를 막는 능력이 있는 용의 상징물이 아니었을까요? 이 망새는 황룡사 강당 터 근처에서 발견된 조각들을 복원한 것인데, 높이가 무려 182cm에 이릅니다. 그 크기가 매우 커서 만들 때나 구울 때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인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옆면과 뒷면에는 연꽃무늬와 얼굴무늬를 별도로 만들어 붙였는데, 얼굴무늬에는 수염을 새긴 것도 있어 남녀를 구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경주박물관>

황룡사에서 나온 기와와 전
황룡사에서 나온 4만여 점의 출토품 가운데 3만여 점이 기와인데, 그 종류뿐만 아니라 만든 시기도 매우 다양합니다. 이로써 신라 진흥왕에서 고려 고종 23(1298년) 불탈 때까지 여러 차례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기와와 암기와 끝에 붙는 수막새와 암막새는 꽃무늬 등 식물 무늬를 장식한 것이 대부분 이지만, 사자.용 등을 장식한 것도 있습니다. 마루 끝을 장식하던 용얼굴무늬 기와는 매우 다양합니다. 특히 황룡사 출토 기와 가운데 네모난 연꽃무늬 사래기와는 삼국시대 기와 가운데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바닥에 까는 전도 많이 출토되었는데 금당터와 강당터의 민무늬 전은 창건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학 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연꽃무늬 수막새 (7세기 전반),
 

연꽃무늬 사래기와 (7세기 전반)와 용얼굴무늬 기와(8세기)


보상화무늬 전 (7~8세기). 보상화무늬는 여러가지 식물의 꽃이나 잎을 조합해서 만든 공상적인 꽃무늬로 사산조 페르시아의 식물문양에 유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역과의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이슬람 건축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식물문양도 같은 기원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넝쿨무늬암막새, 봉황무늬 암막새 (8~9세기)


연꽃무늬 망새, 사자무늬 망새 (8~9세기)


구름무늬 서까래 기와, 연꽃무늬 서까래 기와, 구름무늬 부연기와 (10~13세기)


용얼굴무늬 암막새 (10~13세기)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황룡사 모형. 중문,목탑,금당,강당이 일려로 배치되어 있으며, 사찰전체가 궁궐과 마찬가지로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옆쪽에서 본 황룡사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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