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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남한산성, 동문인 좌익문(左翼門)

younghwan 2011. 12. 2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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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은 한강 유역이 내려다 보이는 서장대를 중심으로 주변 산능선을 따라서 석축을 쌓은 둘레 8km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을 두고 있으며 좌익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동문은 광주지역과 연결되는 성문으로 한반도 중부내륙지방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동문은 산성내 행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위치하고 있어서 좌익문이라고 부른다. 동문은 남문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가장 통행이 많았던 성문으로 광주에서 계곡을 따라 평탄한 길이 나 있기때문에 아마도 산성내 필요한 물자는 동문을 통해서 공급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동문은 지형적인 이유로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했기때문에 실제 우마차나 사람들의 통해은 남쪽편에 있는 제11암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에는 80여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며 많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수원은 풍부한 편이라고 한다. 지금도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산성내에서 자체적으로 식수를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은 전체적을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대부분의 물은 동문 아래족에 있는 수문을 통해서 밖으로 흘러나고 있으며, 지금도 계곡의 수량은 풍부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동문인 좌익문. 경사진 능선에 성문을 세워 놓았기때문에 계단을 통해서 성문을 출입할 수 있다.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래쪽에 있는 제11암문을 많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산산성 동문 홍예. 잘 다듬은 화강석 석재로 홍예를 쌓고 있다.

동문(좌익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 보수하였고, 인조 2년(1624)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정조 3년(1779)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하였다. 이 때 성문마다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광주시청>


좌익문 남쪽편에 위치한 제11암문. 실제로는 암문이라기 보다는 우마차가 통행하던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 동문과 주변 성벽. 도로가 개설된 남쪽편 성벽은 허물어져 있다.


남한산성 동문 좌.우의 성벽


산성 안쪽에서 본 동문(좌익문)


동문 문루. 좌익문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남한산성에서 서쪽편 계곡으로 물을 내려보내는 수문. 지금의 계곡에 비해서 수문의 규모는 작은 편이다.

수문,
해발 370~400m 정도의 산 능선을 따라 축성된 남한산성은 지세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 대부분이 물이 이 수문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가고 있다. 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였다고 전해진다. 수구문 바닥과 천장에는 홈이 파여 있는데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쇠창살을 가로질러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광주시청>


현재의 남한산성 계곡. 겨울이지만 수량은 많은 편이라 할 수 있다.


남장대에서 내려오는 성벽길에 본 동문과 주변 성벽


동문 아래 제11암문과 수문이 있는 곳


동문 아래쪽으로 지금은 광주에서 남한산성으로 들어오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성벽은 허물어져 있다.


광주에서 남한산성으로 계곡길을 따라서 들어오는 도로


산성 안쪽에서 본 남한산성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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