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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특별전, 산성도시를 세우다.

younghwan 2011. 12. 2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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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숙종대와 영.정조대에 남쪽 성벽 부근을 비롯하여 방어상 취약했던 지점에 옹성을 쌓는 등 많은 보완이 있었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한강 동남쪽 지역을 관장하던 광주목 관아를 옮기고 행궁을 건설하는 등 행정적으로도 보완이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갖춘 유일한 행궁으로 비상시 국왕이 거처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하였다. 남한산성을 관장하던 광주목사는 원래부터 정3품의 높은 관직이었지만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부로 승격하여 종2품의 부윤 또는 정2품의 유수가 수장으로 있었으며,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조직인 수어청 수장인 수어사도 겸하게 되었다. 평사시 남한산성에는 약 천명 정도의 군사가 상주하였으며, 주민은 4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산성을 축조하고 방어하기 위해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7개의 사찰을 산성내에 두었다고 한다.

산성도시를 세우다.
남한산성행궁(사적 480호)은 행궁 중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을 갖춘 유일한 곳이다. 이 행궁은 국왕의 임시 거처일 뿐만 아니라 광주의 행정업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몇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이들 관리들은 대개 군사업무도 겸임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남한산성이 군사방어체계에서 주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성 내에는 산성 축성과 관리에 동원한 승려들을 위해 창건된 7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에는 4천 명의 주민이 거주했다고 한다. 따라서 자연히 다양한 문화와 이야기가 생겨났는데, 지금까지 도당굿과 숭렬전 제례, 현절사 제향의 무형문화유산과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산성 안에 주민이 거주하면서 생업을 꾸리며 상업과 시장이 형성되어 있던 남한산성은 하나의 산성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 모형. 남한산성은 좌전(종묘)과 우실(사직)을 갖춘 유일한 행궁이었다. 현재 남한산성 행궁은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며 옛 모습대로 복원될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행궁은 산성도시 안에서 가장 중심의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는데, 동.서로에서 직접 바라볼 수 없도록 낮은 언덕으로 가려진 곳에 위치했다.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높낮이 차이를 둔 두 영역인 상궐과 하궐로 구분되고, 뒤에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을 설치했다. 이는 전국의 행궁 중에서 유일한 사례로 남한산서의 국가와 왕실의 보장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행궁 뒤 언덕에는 숙동대 재덕당이 세워졌고, 하궐 앞에는 정조 때 한남루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세워졌다. 남한산성 행궁 안에는 광주유수의 집무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한산성행궁은 국왕의 임시 거처이기도 하면서 광주부의 행정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중정남한지. 헌종 10년(1844)에 광주유수로 부임한 홍경모가 정조 3년(1779)에 남한수어사 서명응이 하명을 받고 편찬한 '남한지'에 광주부의 구지를 참작하고 관계기사를 채록하여 완성한 읍지이다.

남한산성을 거쳐 간 관리들
1559년부터 1899년까지 광주목사.광주부윤.광주유수를 역임한 관리는 379명이다. 이 중 광주부의 읍치가 남한산성 내에 옮겨진 인조 2년부터가 남한산성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관리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하면 남한산성을 거친 조선시대 관리는 총 266명이 된다. 조선시대 광주지역은 여러 차례 읍격의 오름내림에 따라 파견하는 관리의 품계에 차이가 있었다. 목사에서 부윤, 유수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부윤으로 바뀌는 변화가 계속되었다. 남한산성 관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직책이 수어사이다. 초기의 수어청은 한성부 북부 진장방에 본청을 두어 수어사를 한성부윤이 겸직하도록 했다. 그리고 현장인 남한산성은 광주부윤을 부사로 임명해 운영하다가 이후 운영의 효율화를 위해 1795년(정조19)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부윤을 강주유수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 남문 앞에 모아 놓은 광주부를 거쳐간 관리들의 공덕비. 광주목사, 광주부윤, 광주유수는 정2품에서 정3품에 이르는 장.차관급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으로 당시 한양에서 고관을 지내던 인물들이 잠시 외관직을 맡았던 곳이기도 하다.


광주목사와 광주유수 등을 지낸 임연, 조태채, 조관빈의 초상

임연(1576~1619)은 1618년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임연이 익사공신에 봉해지면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로 17세기 초에 그려진 공신도상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얼굴에 비해 몸.의자.발받침대가 정면을 향하고 있는 것, 화려한 돗자리, 단령 트임의 위치 등은 18세기 초반경의 특징이다. 조태채(1660~1772)는 1703년 수어사에 임명되었다. 노론 4대신 중 한 명으로 담홍색 단령을 입은 반신초상화다.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단령 안에 입은 흰색 모여 배채를 하여 자연스러움을 살렸다.조관빈(1691~1757)은 노론 4대신인 태채의 아들이다. 1744년 수어사에 임명되었다. 얼굴이 화면의 1/2지점 아래에 위치하여, 화면에 비해 인물을 작게 그린 초상화의 예이다. 전체적으로 얼굴표현과 의복 표현에서 경직된 경향이 보인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광주목사와 광주유수 등을 지낸 오명항. 홍봉한, 이시백 초상

오명항(1673~1728)은 1724년 수어사에 임명되었다. 사모에 단령을 입고 있는 좌안칠분면의 반신상이다. 사모가 높고 깃이 파이고 단령의 소매가 넓은 모습 또한 당대의 복제를 반영한다. 홍봉한(1713~1778)은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1756년 수어사에 임명되었다. 좌안 9분면으로 사모와 담홍색 단령의 시복을 입은 반신상이다. 안면의 짙은 운염, 복식선의 굵은 먹선과 선영처리 등은 후에 이모한 본으로 보인다. 이시백(1581~1660)은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도시, 호는 조암이다. 연평부원군 귀의 아들이며, 시방의 형이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수어사였다. 이시백의 사모단령본 반신상은 초상 상부에 "정사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냈고 연양부원군에 책봉된 충익공 조암 이시백선생의 초상"이라는 표제가 단정한 해서로 횡서되어 있다. 이시백은 낮고 둥근 사모와 2품관이 착용하는 운학흉배를 하고 잇는데, 이는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 2등 연양군에 봉해져 2품관에 올랐을 떄와 품계가 일치한다. 화법상 17세기 초반의 정사공신상의 특징을 잘 전해주고 있으며 수준도 뛰어난 편이라 주목된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수어청의 설치와 산성수비
조선후기의 군사제도는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수어청으로 구성된 5군영 체제였는데 이 중 수어청은 남한산성 일대의 방어를 위해 설치된 중앙군영이었다. 처음에는 경기병사 겸 총융사가 관활했으나 병자호란 이후부터는 군영으로 독립해 수어사를 두었다. 초기의 수어청은 한성부 북부 진장방에 본청을 두고 수어사를 한성부윤이 겸직하도록 했다. 이후 운영의 효율화를 위해 정조 19년(1795)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부윤을 광주유수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함으로써 군사지휘소 역할을 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에 주둔했던 병사들이 훈련하던 공간에 있었던 관아건물인 연무관. 광주부 관아건물 중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연무관 상량문. 영조 39년(1763)에 연무관을 중수하면서 쓴 것이다. 연무관 중수 상량문에는 순조 13년(1813)에 중수한 바를 기록하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연무관 도리. 들보에 직각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둘러 얹혀서 연직하중 또는 수평하중을 받는 가로재이다. 숙종 28년(1702) 3월 30일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등단록. 조선후기 각 군영대장의 의망,수점단자를 모은 책으로 편자는 미상이다. 이 등단록은 총 3책의 등단록 중 제2책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장용대장, 총위대장, 수어사 등이 실려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수어영교리노졸수효기. 남한산성을 방어하던 수어청 광주부 소속의 군대 편성과 병력을 볼 수 있는 문서이다. 장교로부터 잡색군까지 직능별 병종과 인원이 앞뒤로 적혀 있고, 15겹으로 접게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고아주부 소속 병력은 총 736명으로 장교 172명, 서리청직 121명, 군졸 238명, 잡색군 142명, 승군 63명으로 편성되어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이이정기 탁본첩, 1816년. 이위정은 순조 중엽(1815)에 남한산성에 세워졌던 사정이고, 기문을 쓴 사람은 김정희이다. 내용은 이렇다 "내가 여기에서 활쏘기를 하는 것은 호시를 일삼아 길이 힘쓰고자 함이 아니라 성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의와 충용이 길이 날로 일어났으면 하는 큰 바람에서이니 어찌 천하가 위복하지 않겠는가" <출처:경기도박물관>


이위정기 편액, 1816년


남한가람지, 1931년. 남한지를 중심으로 남한산성의 사찰과 승군의 제도를 정리한 책이다.


남한산성 축성과 방어를 위해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세운 7개 사찰 중 하나인 망월사.


국청사지 발굴유물. 경기문하재연구원이 시행한 국청사지 시굴조사에서 다량의 기와와 백자가 출토되었다. 조선시대 암막새와 창해파문수키와, 무문 암키와, 방형전 등이 출토되었고 도.자기류로 다양한 생활용기가 출토되었다. 이밖에 석제벼루, 고드레, 원판형토제품, 상평통보 등이 출토되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한흥사지 발굴유물. 한흥사지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태'자가 찍힌 명문와 2점이 지표에서 출토되었고, 청록색 유약을 바른 청기와도 확인되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삶 그리고 문화
조선시대 남한산성 내에는 큰 길가 양 옆으로 초가로 지은 상점들이 연이어 들어섰고, 일반 민가들은 행궁보다 낮은 저지대인 비교적 평지에 밀집되어 도시적 마을을 형성했다. 주거지는 중앙의 동서로를 기준으로 남동과 북동으로 나뉘어졌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통계를 보면 산성내 남동에 614호로 남자 1,119명 여자 1,055명, 북동에 462호에 남자 1,009명 여자 853명이 살아서 대략 6:4의 비율로, 개천이 흘러 생활여건이 상대적으로 나은 남동의 규모가 더 컸다고 보인다. 남한산성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꽃피웠다. 군역동원을 위해 세운 사찰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고 무속신앙이 성행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숭렬전 제례와 도당굿 등 무형문화와 각종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호패. 조선후기에 만드어져 남한산성에서 사용됐던 호패 세점이다. 호패는 16세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차고 다녀야 했는데, 인구수를 파악하고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호패로 보아 이만영은 경신년(1800)에 태어나서 남한산성 내 남부에 살았고, 이병희는 정해년(1827)에 태어났으며 이병희도 정해년(1827)에 태어났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동전을 비롯한 생활용품들


분청사기. 행궁 서원 암거 석렬 하단부에서 출토된 분청자 대접은 내측면 상하에 선상갑문대를 배치하고 그 사이에 작은 국화문을 인화시문하였다. 분청자 접시는 이위정에서 출토되었으며 내저면에 코일링을 백상감하였다. 행궁지에서 출토된 분청자병은 외부에 버드나무와 우접문이 시문되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백자. 백자는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백자 발, 접시, 종지 등의 기종이 대부분이고 색깔은 대게 회백색, 회색, 암회색, 담청백색, 담청자백색 등 다양하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청화백자. 내저 중앙에는 원권안에 '수'자를 도안하였고, 외면은 구연과굽 외축에 정타선을 돌리고 측면에 복을 상징하는 박쥐와 불수문을 상감하였다. 청화백자는 대부분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문양이 다양하고 기종은 접시나 잔 등이 출토되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해동죽지, 1925년. 최영년이 66세 되던 해인 1921년에 지은 책으로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민속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책의 중편 음식명산에 해장국의 일종인 광주 남한산성의 효종갱을 소개하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을 찾은 외국인 선교사들


남한산성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


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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