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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강화해협(염하)가 내려다 보이는 동문에서 북문까지

younghwan 2012. 2. 2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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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성은 그리 높지 않은 해발 220m의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 우리가 솥다리처럼 받치고 있어서 정족산성 또는 삼랑성이라고 불린다. 이 성을 쌓은 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바깥쪽에 돌을 쌓아 석축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의 산성은 거친 활석을 비롯하여 잔돌로 촘촘하게 석축을 쌓았는데 서울의 아차산성이나 고구려가 쌓은 여러 산성들과 입지나 석축을 쌓는 수법이 비슷한 것으로 볼 때 고구려가 백제를 몰아내고 한강유역 패권을 잡은 이후에 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족산성은 서북쪽 해발 220m의 정족산이 가장 높은 산이고, 남쪽편과 동쪽편에 비슷한 높의 봉우리들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등사와 정족산 사고가 있었던 산성내부는 강화해협(염하)가 있는 동쪽편으로 개방되어 있는 형태로 남문과 동문이 산성의 동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산성이 세계의 봉우리를 연결하고 있지만, 동쪽을 제외하고는 지형적 제약조건으로 적이 공략하기 쉽지 않았고 주로 동쪽편 남문과 동문 사이가 적의 예상공격방향이었던 것 같고, 실제로 병인양요시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무찌른 장소이기도 하다.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프랑스군의 전투가 있었던 강화산성 동문. 강화산성은 남문의 종해루 외에는 문루를 두고 있지 않다.


정족산성 석축은 삼국시대에 쌓은 것을 크게 고치지 않고 조금씩 보강해서 사용한 산성으로 동문 주위에는 조선시대 읍석처럼 약간 큰 돌을 사용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고구려 산성의 석축처럼 작은 돌을 촘촘하게 쌓고 있다.


산성 동문 내부와 안쪽에서 본 동문. 아치는 조선후기에 보강한 것으로 보이며 벽돌을 사용해서 아치를 쌓고 있다.


정족산성 석축 안쪽으로는 토성의 형태를 보이는데, 성문 주위에는 토축을 상당히 두텁게 쌓았다.


정족산성 동문에서 동쪽편 봉우리로 오르는 성벽길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성문 주위에는 조선후기에 보강한 것으로 보이는 여장과 총구가 설치되어 있다. 강화산성은 지형적인 잇점으로 성벽 위에 여장을 설치할 필요가 많지 않으나, 방어상 취약한 동쪽편 낮은 지대의 성벽에는 여장과 총구를 설치하고 있다.


서울 성곽의 여장과는 달리 단순하게 석축을 성벽 안쪽보다 약간 높게 쌓아서 여장의 기능을 하게 하고 있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석축


능선의 방향이 서쪽으로 바뀌는 중턱 부근에 정족산성 동쪽편을 감시할 수 있는 치성 또는 돈대에 가까운 성곽 방어시설물을 만들어 놓고 있다. 이 곳에선 수도 한양을 향한 주요 뱃길인 염하(강화해협)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곳에서는 염하(강화해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와 김포의 덕포진 주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 큰 전투들이 일어났던 곳이다.


정족산성 남서쪽으로 멀리 마니산이 보인다. 실제로 마니산 방향은 지형적인 이점도 있고, 섬 내부지역이기때문에 방어가 그리 중요한 지점은 아니었다. 강화도 남쪽은 넓은 갯벌이 있어 포구가 발달하지 못해서 바다로부터의 침입이 거의 힘든 지역이기도 하다.


산성 아래쪽에는 석축을 쌓아 여장의 기능을 하고 있지만, 봉우리가 가까운 높은 지역에는 여장의 역할을 하는 석축을 쌓지 않고 있다. 방어에 용이하도록 크고 작은 치를 만들어 놓고 있다.


정족산성을 이루는 3개의 봉우리 중 동쪽편 봉우리.


봉우리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시야가 넓게 뚫려 있다. 동쪽편으로 강화해협 전체가 한눈에 들어 온다. 멀리 강화해협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문수산성이 보인다. 산성 아래로는 길상면 소재지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온수리 성당 건물이 보인다.


강화도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대몽항쟁기 고려시대 왕릉이 있는 진강산과 간척지가 많은 강화도의 특징인 여러 저수지들 하나인 길정저수지가 보인다.


정족산성 아래에 위치한 길상면 소재지


서쪽편으로 보이는 석모도로 가는 외포리선착장이 있는 국수산과 그 너머로 교동도 화개산이 보인다. 조선시대 비상연락체계인 봉수대들이 연결되는 방향이라 할 수 있다.


봉우리 부근 성벽길에 설치된 방어시설인 치(雉). 치는 산성을 공격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약간 돌출해서 석축을 쌓은 형태이다.


봉우리 부근의 성벽길


정족산성에서도 전망이 좋은 위치


강화도 서쪽편 석모도와 강화도 사이의 해협이 멀리 보인다. 아주 오래전에 간척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정족산성의 주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발 220m의 정족산.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이 그리 가파르지 않으며, 성벽 바깥쪽으로는 경사가 급하여 적을 방어하기에 용이하다.


높은 지대의 성벽 석축은 훼손이 적어서 그런지 잔돌을 촘촘하게 쌓은 고구려산성의 특징이 잘 남아 있다.


산성의 방어 시설인 북문 부근의 치.


온수리 지역과 연결되는 북문은 작은 암문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삼랑성, 사적 130호,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다. 병인양요(1866)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1976년에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출처:강화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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