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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남문인 종해루와 주변 성벽, 양헌수 승전비

younghwan 2012. 3. 4.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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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족산성은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우리를 능선을 따라서 연결한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의 방향은 강화해협(염하)를 바라보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지금은 정족산성 동쪽편으로 넓은 간척지 평야가 펼쳐져 있지만, 원래는 넓은 갯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안을 따라서 구축한 돈대와 함께 강화도 남쪽 해안과 연안 해로인 강화해협을 감시하고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산성으로 생각된다. 이 곳은 오랜 옛날부터 천혜의 요새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정족산 사고가 산성내에 설치되어 있다. 

 정족산성의 주출입문은 남문으로 실제로는 산성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계곡의 시냇물이 흘러 내려가는 방향이다. 일반적인 산성과는 달리 평지와 비슷한 고도에 성문이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과도 상당히 가까운 편이다. 산성을 방어함에 있어서 취약한 부분이 되는 곳이기도 하며, 동쪽편 언덕에 있는 동문과의 거리도 가까운 편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격전이 벌어졌던 곳 또한 남문과 동문 부근이었다고 한다. 정족산성에는 남문에만 문루를 두고 있었으며, 무너져 있던 남문과 문루인 종해루를 1976년에 원형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1976년에 복원한 정족산성 정문인 남문과 종해루. 전형적인 조선시대 성관의 출입문과 문루의 형태를 하고 있다. 남문은 전등사와 정족산 사고가 있는 산성을 출입하는 정문으로 평지와 고도차가 별로 없는 마을과 가까운 성문이다. 삼면이 봉우리와 능선으로 둘러싸인 정족산성에서 방어가 가장 취약한 지점으로, 내성과 외성을 구분하여 두는 것이 바람직한 형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족산성 남문에서 남쪽편 능선으로 연결되는 성벽. 이 산성은 포곡식 산성의 전형적인 형태로 남문에서 곧바로 능선을 따라서 성벽이 이어져 있다. 남문 주위 성벽에는 여장, 총구 등의 방어시설들을 만들어 놓고 있다.


남문에서 북쪽 언덕으로 이어진 성벽. 이 성벽이 연결된 언덕은 그리 높지 않아서 남문과 함께 방어가 취약했던 지점 중 하나이다. 병인양요 당시 주로 이 성벽과 언덕너머 동문 주변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산성 내부에서 본 남문과 문루


전등사와 정족산 사고로 들어가는 길. 전등사는 정족산 사고를 지키는 승병들이 머무는 역할을 했던 사찰로 조선후기 국방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승병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쪽편 능선으로 이어지는 성벽길에서내려다 본 남문


남쪽편 능선으로 이어진 성벽길은 경사가 급한편으로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용이한 구조이다.


정족산성 동남쪽 치성 부근의 성벽. 경사가 있어 적을 방어하기에는 용이했지만 낮은 지대에 있어서 조선후기에 보강한 것으로 보이는 여장을 볼 수 있다.


치성 부근에서 내려다 본 정족산성 동쪽편. 멀리 강화해협 부근의 덕진진, 초진진, 덕포진이 보인다. 덕진진에서 정족산성 입구까지 연결된 길이 옛날 서울에서 정족산성으로 들어오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병인양요때 강화산성이 함락된 이후 양헌수가 급하게 끌어모은 포수를 비롯한 병사 300여명을 이끌고 덕진진을 건너서 이 길을 따라서 정족산성으로 진입했다고 한다.


정족산성 동문 부근의 성벽길.


강화산성 동문


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벽길. 이 곳에 여장을 설치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전등사에서 동문으로 나가는 길


동문 앞에 조그많게 세워진 양헌수 승전비


양헌수 승전비, 길상면 온수리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라고 새겨져 있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14년(1848)에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을 지내다가 1866년에는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을 패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출처:강화군청>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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