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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서울 삼군부 청헌당, 육군사관학교 경내로 옮겨진 조선시대 관아 건물

younghwan 2012. 3. 22.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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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공릉등 육군사관학교 경내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인 삼군부 청헌당이다. 삼군부는 조선초 군사관련 업무와 군령을 통합관리하던 관청으로 종래의 십위군을 중.좌.우군의 3군으로 나누고 자체 감독권과 지원권을 갖는 중앙 군사체제였다. 삼군부 체제는 후에 오위체제로 개편되기까지 중앙부대인 동시에 왕권과 수도를 방위하는 병력을 지휘.감독하는 최고 군부로 자리잡았다. 조선중기에는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하다가 군사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비변사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국가 최고합의 기관으로 비대화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 최고기관이었던 의정부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졌다. 고종대에 흥선대원군은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고 조선개국초의 정신을 되찾는다는 의미로 삼군부가 다시 설치되었다. 삼군부는 1880년 근대적인 군사체제를 도입한다는 취지로 폐지되고 그 직무는 통리기무아문으로 올겨졌다. 그후 임오군란으로 다시 부활하기는 했다가 다시 폐지되었다.

 삼군부 건물은 비교적 최근인 고종대에 지어진 건축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지 않은 조선시대 중앙부처 관아 건물 중 하나로 정청인 총무당, 그 좌우에 보조건물격인 청헌당과 덕의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청인 총무당은 서울 돈암동 서울성곽 낙산 동쪽편 언덕 아래로 옮겨졌고 보조 건물인 청헌당은 공릉동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졌고, 덕의당은 남아 있지 않다. 청헌당은 1967년까지 광화문 광장 서쪽 정부종합청사자리에 있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청헌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그리 크지 않은 건물로 초익공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육사경내로 옮겨져 있는 조선시대 최고군사조직인 삼군부 관아 건물 중 청헌당이다. 구한말인 1868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지 않은 조선시대 중앙 관아 건물 중 하나이다.


청헌당 현판


기둥위에 보를 바치는 구조는 초익공을 하고 있으며, 겹쳐마 서까래를 하고 있다.


추녀마루끝 용머리 장식


문살은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형태인 띠창살을 사용하고 있다.


삼군부 청헌당 전경


청헌당은 삼군부 정청인 총무당 왼쪽편에 붙어 있던 보조건물로 복도각으로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현재 총무당 건물은 서울성곽 낙산 동쪽편 한성대학교 교정 앞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삼군부 청사가 있었던 곳에는 현재 정부종합청사가 세워져 있다. 삼군부 건물은 1967년 이 건물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 곳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문무가 조화를 이루를 정치를 추구했으며, 최고 군사조직인 삼군부는 경북앞 광화문 서쪽에, 의정부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삼군부 청헌당, 서울 노원구 공릉동
이 건물은 1868년(고종5)에 지은 것으로, 조선말기에 설치된 삼군부의 청사다. 이 청사를 지은 2년 뒤인 1870년 4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 79칸이 모두 없어졌으며, 같은 해 윤 10월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때 청헌당까지 다시 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67년까지 본래 위치에 있었으나 정부중앙청사를 지으면서 같은해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1977년에 수리하면서 다소 모습이 달라졌다. 청헌당의 규모는 정면5칸, 측면 3칸이며, 기둥 위를 초익공을 짜고 팔작지붕을 얹어 꾸몄는데, 이는 조선말기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삼군부 시절에는 정청인 총무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크기가 다소 작은 청헌당과 덕의당이 나란히 있었고, 총무당과는 복도각으로 이어져 있었다. 조선 초에 문무를 양립하는 정치를 펴고자 의홍삼군부를 창설하고, 건물도 의정부 맞은편에 두었었다. 고종은 이런 국초의 전통을 되살려 1865년(고종2)에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고 대궐의 수비와 도성 순찰같은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출처: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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