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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사찰

안양 안양사, 중초사(안양사) 옛 절터 뒷편에 세워진 사찰

younghwan 2012. 3. 30.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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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고려 태조가 삼성산 자락 아래에 창건했다고 알려진 사찰로 안양시 지명의 유래가 되었던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안양사는 고려시대 큰 사찰이었던 안양사는 아니고, 한국전쟁 이후 새로 지은 건물들이라고 한다. 실제 안양사는 안양예술공원 입구에 위치한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중초사지(안양사지) 옛 절터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안양사는 옛 안양사에 소속되었던 작은 암자가 있었던 장소이거나 안양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새로 건립된 사찰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왕조와 관련된 무학대사가 수도했다는 조선시대 최대의 사찰이었던 양주 회암사와 비슷한 경우로 보인다. 고려시대 안양사는 이 지역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통요지에 위치한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로 최근 중초사지가 위치한 유유제약 공장마당을 발굴조사한 결과 최영 장군이 세웠다는 7층전탑의 벽돌들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유적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안양사는 중초사지 옛절터에서 계곡안쪽으로 800여m 떨어진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에는 옛 안양사의 흔적으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부도와 부도탑의 귀부만이 남아 있다. 사찰건물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에 세워졌다고 하며, 안양도심과 가까이 위치하고 있지만 조용한 산사의 느낌을 주고 있는 사찰이다.



안양사 옛 절터에서 800여m 떨어진 삼막사가 있는 삼성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안양사 전경. 안양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천불전, 산신각 등의 불전과 요사채인 심검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부분 최근에 세워진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안양사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사찰입구. 전통적인 대형사찰과는 달리 일주문, 천왕문 등의 출입문이나 강당문루 등이 세워져 있지는 않다.


사찰입구에는 한국전쟁 이후 이 사찰을 새로 지을때 지은 요사채로 사용되었던 60년대풍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사찰입구의 작은 연못


사찰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60~70년대풍의 오래된 요사채 건물, 그옆에는 현대 사찰에서 필수적인 불전으로 죽은이의 명복을 비는 공간인 명부전이 세워져 있다.


불전들은 입구에서 뒷편 언덕에 배치되어 있는데, 강당건물은 없고 요사채인 심검당과 대웅전이 일자로 나란해 배치되어 있다. 입구에는 2마리의 사자석상이 세워져 있어 이 곳을 찾는 신도들을 맞이하고 있다.


안양사 요사채인 심검당. 신도들이 잠시 쉬는 공간인 강당역할을 겸하고 있다.


안양사 주불전인 대웅전.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화련한 단청과 공포로 장식하고 있는 정형화된 최근 불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안양사 부도는 탑신과 기단중석은 없으며 하대석은 높은 2단의 8각 지대석으로 부연을 장식하였고 상대석은 앙연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필각3단의 옥개받침위에 올려 있고 처마의 상한선이 전각부분에서 반전하며 높이는 1.36m, 너비 1.35m로 양식의 특징을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부도란 고대 인도의 범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부처, 불신을 뜻하며 불가에서 스님이 열반 후 사리나 유골을 모시는 곳이다. <출처:안양시청>


고려시대 안양사와 관련된 고승의 탑비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었는 거북받침돌이다. 정형화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조각수법은 빼어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안양사 귀부는 비신과 이수는 없어지고 귀부만 남아 있다. 몇개의 장대석으로 지대를 구축했고, 굄대와 귀부가 한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귀부 정상 중심에 비좌를 설정하고, 비좌의 각면을 외겹 연꽃무늬로 돌리고 있다. 귀갑문은 6각형이며,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처럼 새겨 사실적이고, 귀부 뒷편에 꼬리를 옆으로 새겼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이 귀부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보이는데, 높이 1m, 길이 3m, 너비 2.18m에 달한다. <출처:안양시청>


안양사 범종루


안양사 불전 뒷편에는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보관을 쓰고 있는 미륵보살입상이 세워져 있고, 그 양쪽으로 천불전과 산신각이 세워져 있다.


고려초기에 많이 세워졌던 미륵보살입상의 형태를 하고 있는 불상


안양사 산신각과 천불전, 범종각


 안양시 석수동 안양예술공원(옛 안양유원지) 입구에 위치한 제약회사 유유제약 공장은 통일신라 흥덕왕 2년(827)에 세워진 중초사와 고려 태조 왕건이 900년에 세웠던 큰 사찰인 안양사가 있었던 큰 절터이다. 지금은 공장 한쪽편으로 모아놓은 보물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고려시대에 세운 삼층석탑, 공원주차장 뒷편에 남아 있는 마애석종만이 이곳이 옛절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전통사찰 안양사,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오늘날 안양시 지명 유래의 근원지인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 3년(900년)에 고려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러 지나다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가득 피어 오르자 이를 이상히 여겨 살펴보다가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세워진 사찰로 전해진다. 안양이란 불가에서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청정한 극락정토의 세계를 말하며 현세의 서쪽으로 10만억 불토를 지나 있다는 즐거움만 있고 자유로운 이상형 안양세계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때 최영 장군이 7층 전탑을 세우고 왕이 환관을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천명이 불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옛 안양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팔각원당의 부도와 귀부가 있다. 귀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글을 짓고 명필 이원부가 쓴 비문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태종 11년(1411)에 왕께서 충남 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가던 중에 안양사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고 안양사와 관련된 여러 수의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출처:안양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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