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지역박물관

해사박물관, 충무공 이순신장군 행적

younghwan 2012. 4. 26. 21:43
반응형


 진해 해군사관학교 교내에 있는 해사박물관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행적에 대한 기록과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되었던 조선 수군의 여러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행적을 보여주는 각종 고문서류들로는 후손들이 쓴 이충무공행장, 정조대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길, 서간첩, 후대에 쓰여진 각종 전기류들을 수집.전시하고 있다. 실제로 전시된 유물들 중 원본을 전시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상당수는 아산 현충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류들의 영인본을 교유적차원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진품은 아니더라도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것들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한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32세인 1580년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지휘관인 만호가 되었고, 1591년에는 한국 남해의 4개 함대 중의 한 함대의 사령관, 즉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이때 그는 장차 일본으 침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여 충실하게 전비태세를 갖추었으며, 한편으로는 창의력을 발휘하여 당대무비의 전선인 거북선을 제작 건조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초기 접전에서 조선의 2개 함대가 일본함대에 의해 궤멸되었다. 드디어 이순신 함대가 출동하였고 그는 승승장구하는 일본함대를 겨파하였다. 1592년 한해동안 그는 10번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 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군의 전진을 차단하였다. 1593년 8월 조선정부는 이순신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연합함대사령관 즉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4년동안 그는 열세한 함대로서 막강한 일본함대를 잘 방어하였으며, 최후의 결전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순신은 조선정부의 권력 암투의 희생물이 되어 연합함대 사령관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감옥에 갖히게 되었다. 한편 이순신이 없는 조선함대는 1579년 7월의 칠전량해전에서 일본함대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였고, 결국 이로 말미암아 조선의 연합함대는 궤멸되었다. 위기에 처한 조선정부는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였다. 그는 12척의 패잔전선으로 노도와 같이 진격하는 일본함대를 맞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12척의 조선함대는 133척으로 된 일본의 대함대를 격파하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1년동안 이순신은 함대세력증강에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여 최후의 결전에 대비하였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은 퇴각하는 일본함대와 결전을 벌여, 노량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자신도 또한 전사하였다. 그는 7년동안 15번의 해전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일본의 조선정복 야욕을 분쇄하였고, 그의 조국을 멸망의 위기로부터 구출하였다. 조선정부는 그에게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리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인들은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출처:해사박물관>



충무공가승, 이충무공의 각종 유고와 행장 등을 공의 후손들이 6권 2책으로 만든 책


이충무공 표준영정(모사품). 강우성 화백이 1963년에 그린 이충무공 초상화이다. 정부에서는 이 영정을 1973년에 표준 영정으로 지정하였다. 원그림은 현충사에 봉안되어 있다. 이충무공가계도, 덕수이씨의 12대 후손으로 4형제 중 세째로 태어 났으며, 슬하에 5남3녀를 두었다.


충무공 행장, 덕수이씨 집안에 전래되어온 충무공 행장으로서 공의 어린시절 모습과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무과급제 교지, 1576년(선조9), 이충무공이 32세 때 무과에 급제한 교지, 원본은 현충사에 있다.


최회량 임란첩보서목(보물 660호, 복제품), 홍양현감 최희량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1598년 전투에서 승리했음을 알리는 보고서. 이순신 친필과 수결이 있음.


이충무공 서간, 1590년(선조23), 이충무공이 정읍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신 병사에게 보낸 안부편지


이충무공 어문 난중일기 정유년(1597년) 9월 15일 일기 중의 한 구절로, 명량해전 하루전날 공이 군사들에개 말한 내용임. (필사즉생 필생즉사), "반드시 죽으려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라는 내용임, 부신진 순절도(오른쪽),
 

임진세, 본교 이충무공 사적 답사반이 거제시 동부면 가발리에서 발견 수집한 자료임. 조선후기 수군자료로서 관함식순서, 선박, 인원, 각 진의 거리 등에 관한 내용임


감결, 1598년 3월 12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함대의 정박 중 군령을 예하부대에 하달하는 일종의 공문서로서 일본함대의 야간공격에 대비한 경계작전명령문이다.


사부유서, 1591년(선조24) 2월 15일 충무공께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될 떄 받은 유서로 원본은 아산 현충사에 있음.


조선 사공명부, 조선은 조선시대에 세금으로 거둔 곡물을 운반한느 정부의 조운선이다. 이것은 조운선의 명칭과 선원의 인적사항이 기재된 명부이다.


사부유서, 1594년(선조27) 7월 14일 충무공께서 삼도수군통제사 재임 중에 받은 유서이다. 원본은 아산 현충사에 있음.


이충무공 난중일기 영인본.


이충무공 친필일기 영인본, 공의 난중일기 중 정유년(1597) 4월에 쓰신 일기로서, 백의종군 중에 어머님의 상을 당한 후 쓰라린 심정을 기록한 내용임


충무공 시호교지(왼쪽, 영인본), 공이 전사 하신후 45년 만인 인조 21면(1643)에 조선 조성으로부터 공에게 충무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충무공의 한산도가(오른쪽),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이 쓴 이충무공의 한산도가임.


선무원종 공신록권, 임진왜란 때 군공을 세워 포상을 받은 9,060명의 명단을 수록한 책


이충무공 친필 서간첩(영인본), 이 서간첩은 이충무공이 일가 친척에게 보낸 친필 편지로서 원본은 국보 76호로 지정되어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주사선연도(왼쪽), 1604년 그린 당포해전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그림, 이충무공의 진중시(오른쪽), 공의 진중시를 백범 김구 선생이 1946년 진해 방문 기념으로 쓴것이며, 그 시비가 지금 진해시 남원로타리의 해군사관학교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그 탁본임


이충무공전서, 조선 정조19년(1795) 윤행임 등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이며, 전 14권 8책으로 구성됨.


조선징비록, 1894년 이름을 알 수 없는 일본인 저자가 유성룡의 징비록을 일본어로 번역한 책임, 조선 이순신전, 일본 육군 보병 대위 시바야마가 1892년에 지은 책


1908년 단재 신채호가 국한문 혼용의 자필로 쓴 이충무공 실기를 비롯한 다양한 이충무공 전기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