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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신라 헌강왕릉(사적187호)와 정강왕릉(사적186호), 경주 남산 동쪽 통일신라 쇠퇴기 왕릉

younghwan 2012. 6. 6.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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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남산 동쪽편 통일전과 서출지 근처 북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헌강왕릉(사적187호)와 정강왕릉(사적 186호)이다.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여 웅장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던 괘릉 이후의 신라 왕릉과는 달리 소박한 느낌을 주는 통일신라 쇠퇴기 왕릉이다. 괘릉 이후에 정착되어가는 문인석, 무인석 등의 석물과 둘레석의 십이지신상, 난간석 등 왕릉을 구성하던 장식은 보이지 않고, 서구의 신전 제단같은 상석도 단순한 장방형 화강석 석단으로 바뀌어 있다. 봉분에는 단순하게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둘레석을 둘렀을 뿐이다. 외형에 있어서는 신라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릉과 비슷하며, 복고적인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진흥왕릉 부근의 문성왕릉이나 헌안왕릉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헌강왕은 신라 49대, 정강왕은 신라 50대왕으로 문성왕의 아들로 형제관계로 신라가 급격하게 쇠락한 진성여왕이 이들의 누이동생이다. 헌강왕은 문치에 크게 힘썼으며, 황룡사에서 큰 법회를 열고, 당나라에 조공하였다고 한다. 또한 처용무가 크게 유행하였으며, 당시 경주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등 사치와 환락의 시대였다고 한다. 이 시기는귀족들간의 왕위쟁탈전이 끝나고 약간의 안정을 찾으면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정강왕은 헌강왕의 동생으로 재위기간이 만1년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경주 보리사 남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왕릉은 약 200여m 떨어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 헌강왕릉 올라가는 길. 경주 남쪽 동쪽편으로 지나가는 도로에서 50여m 정도 걸어서 들어가면 왕릉이 나타난다.


경주 왕릉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경주 특유의 꾸불꾸불하게 자라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숲길 사이로 보이는 헌강왕릉. 괘릉을 비롯하여 통일신라 전성기 왕릉 앞에는 마당처럼 넓은 능역이 조성되어 있고 석물이 세워져 있는데, 통일신라 쇠퇴기의 왕릉으로 봉분만이 소나무 숲속 언던에 남아 있다.


봉분만이 남아 있는 사적 187호로 지정된 헌강왕릉. 봉분 높이 4m의 원형봉분으로 전성기 왕릉에서 볼 수 있었던 12지신상이나 난간석 등은 없고 단순하게 잘다듬은 화강석을 4단으로 쌓은 둘레석만이 있다.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여서 세웠던 문.무인상 등 석물들 또한 세워져 있지 않다.


서구의 신전에서 볼 수 있었던 웅장한 제단은 없어지고 단순한 정사각형 형태의 상석만 있다. 왕의 업적을 기록한 거북받침돌 위에 세운 비석 또한 없다. 헌강왕대에는 숯으로 받을 짓는 등 상당히 번성했다고 하나 왕릉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 보기는 힘들다.


잘 다듬은 화강석을 4단으로 쌓은 봉분의 둘레석


뒷편에서 본 헌강왕릉

신라 헌강왕릉, 사적 187호, 경주시 남산동
이 능은 신라 49대 헌강왕(재위 875~886, 김정)을 모신 곳이다. 봉분 높이 4m, 지름 15.8m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며, 봉분 하부에 4단의 둘레돌을 돌렸다. 내부 구조는 연도가 석실의 동쪽 벽에 치우쳐 있으며, 석실의 크기는 남북 2.9m, 동서 2.7m이다. 벽면은 비교적 큰 깬돌을 이용하여 상부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게 모서리를 죽이는 방식으로 쌓았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묘도를 갖추고 있으며, 연도의 크기는 길이 142cm, 너비 128~96cm이다. 석실 내에는 서벽에 접해서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성석이 있다. 헌강왕은 경문왕의 태자로서 문치를 잘 하였으며, 이 시기에 처용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93년 왕릉 내부가 조사되었다. <출처:경주시청>


헌강왕릉 남쪽편에 위치한 정강왕릉으로 들어가는 길


정강왕릉 주변의 소나무숲


사적 166호로 지정된 정강왕릉. 봉분의 높이는 4m로, 잘 다듬은 화강석을 2단으로 둘레돌을 쌓았다.


왕릉에는 특별한 석물은 세워져 있지 않고, 사각형으로 단순하게 만들어진 상석만이 놓여 있다.


정강왕릉 둘레석


뒷편에서 본 정강왕릉



왕릉 주변에는 돌로 쌓았던 구조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라 50대 정강왕릉

신라 정강왕릉, 사적 166호, 경주시 남산동
이 능은 경주 남산의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라 50대 정강왕(재위 886~887년, 김황)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4m, 지름 15m로 둥글게 흙을 쌓은 봉토분이다. 봉분 하단에는 둘레돌을 돌렸는데, 최하단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방형 깬돌을 2단으로 쌓았다. 바로 앞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상석이 있고, 그 앞에 다듬은 장방형 화강석으로 축조한 석단이 있다. 정강왕은 헌강왕의 아우로 886년 7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 병으로 죽어 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1년밖에 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경주시청>


두 왕릉 앞으로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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