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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경주 서악서원, 김유신 장군과 최치원, 설총을 모신 서원

younghwan 2012. 6. 2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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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설총, 최치원을 모신 서원인 서악서원이다. 이 서원이 처음 세워진 것은 조선 명종때 경주 부윤 이정이 김유신을 모시기 위해 서원을 건립하였으며 지역 유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총과 최치원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서원을 세울 때 퇴계 이황이 서악정사라 이름을 짓고 직접 글을 써 현판을 달았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였다고 한다. 인조대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서악서원이 위치한 서악동은 선두산 동쪽편 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경주를 남북으로 흐르는 형산강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다. 주변에는 신라를 크게 중흥시킨 진흥왕의 능을 비롯하여 삼국을 통일한 태종무열왕의 능, 김유신 장군묘, 문무왕의 동생으로 삼국통일에 크게 공헌한 김인문의 묘를 비롯하여 서악동 고분군 등이 있다. 삼국통일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현재의 서악서원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중건한 것으로 앞쪽에는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이, 뒷편에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강학공간은 강당건물인 시습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가, 앞쪽엔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는 누각인 영귀루를 두고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서악동 마을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서악서원은 마을 앞으로 펼쳐진 들판과 형산강, 그 너머로 경주 도심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오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서악서원 출입문.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외삼문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서악서원 강학공간의 중심건물이 되는 시습당.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서악서원 현판


시습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 대청마루. 지금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문화체험행사를 많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강당 바깥쪽에 있는 작은 온돌방


뒷편에서 본 강당인 시습당


서원강당에서는 경주 도심풍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원래 출입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누각은 앞면 5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상당히 큰 규모로 지어졌다. 아마도 서악서원을 찾는 외부인사들이 많아서 손님들을 위해 크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마당 한편에 있는 옛 건물의 석재들과 정료대


강당 뒷편 서적등을 보관하는 건물


사당 출입문인 내삼문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오래된 느낌을 주고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당에 비해 웅장하게 지어졌다. 삼국통일에 공이 큰 김유신 장군을 비롯하여 유학자인 최치원과 설총을 모신 사당이다.


서원 관리인이 거주하는 살림집


서원입구에 세워진 비석


서악서원 전경

경주 서악서원, 경주시 서악동
이 서원은 조선 명종 16년(1561) 경주부윤 이정이 김유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당시 경주지역의 선비들이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도 같이 모실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이정은 퇴계 이황과 의논하여 함께 모시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 서악정사라 이름하고 손수 글씨를 써서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모두 불탔고, 인조 때 다시 세워져 나라에서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지금의 글씨는 당시의 이름난 서예가 원진해가 쓴 것이다. 뒤에는 사당을, 앞에는 강당인 시습당을 배치하고, 영귀루를 맨 앞에 두어 전학후묘의 자리배열을 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이다. 시습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이다. 왼편으로 진수재를, 오른편으로 성경재를 두었다. 영귀루는 앞면 5칸에 옆면 1칸의 누각이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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