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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진남관 임란유물전시관, 전라좌수영과 진남관 관련 유물을 전시해 놓은 작은 전시관

younghwan 2012. 11. 1.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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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진남관은 우리나라 최대의 단층목조건물로 앞면 15칸, 옆면 5칸의 큰 건물이다.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 관아 건물 중 중심이 되는 건물로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좌수영을 방문한 관리들이 묵는 숙소로 사용되었던 객사 건물로 통영 세병관과 함께 조선시대 남해안을 지키던 조선 수군의 위용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진남관 입구 오른편에는 크지는 않지만 진남관과 전라좌수영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남해안을 지키던 수군의 역할, 객사건물이었던 진남관의 건축적 의미, 전라좌수영의 규모와 성격,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과 전라좌수영의 활약들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진남관의 규모와 용도
진남관의 정면길이는 54.5m, 높이는 14m, 넓이는 748㎡, 기둥은 68개나 되는 우리나라 최대의 단층목조 건물로서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우리나에서 이와 같이 기둥사이가 15칸이나 되는 건물은 사찰의 회랑, 궁전의 행랑, 종묘의 정전같은 건물을 제외하고는 합천 해인사의 정경판전과 진남관 단 두곳 뿐이다. 진남관은 지방관아 건물이었다는 점에서 규모의 특징을 찾을 수 있으며, 학술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건물이다.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진남관은 전라좌수영의 객사로 건립되었다. 객사는 성 안의 중요한 위치에, 또는 관아와 함께 세워지는 중심 건물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비와 궐패를 모셔놓고 관아의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 또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향궐망배'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지방 관리들이 임금을 가까이 모시듯 선정을 베풀 것을 다짐하던 곳이다. 또한 진남관은 외국의 사신과 중앙으로부터 왕의 명을 받들고 내려온 대신을 접대하는 건물로 사용하기도 했다. <출처:여수시청>


국보 304호로 지정되어 있는 진남관. 전라좌수영 객사로 지어진 이 건물은 앞면 15칸, 옆면, 5칸의 큰 건물로 현존하는 단층목조 건물 중에서는 최대규모이다.

진남관의 건축적 특징
진남관은 돌을 다듬어 단정하게 쌓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두리기둥을 세우고 벽체없이 팔각지붕을 얹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는 화반을 받쳤는데, 주심포와 다포양식을 절충한 것이다. 외부의 살미첨자는 쇠서와 함께 연꽃모양의 화문을 조각하여 하나의 장식판처럼 변형되었고, 건물의 전.후면에서 안쪽으로 제2주열에 높은 기둥들을 배열하여 그 위에 대들보를 가구하면서도 내부 곳곳에 내고주를 세워 중간을 받치게 하였다. 특히 기둥의 배열에서 건물 양쪽 끝 세번째 측면 기둥만을 열을 흐트러 놓아 내부가 복도처럼 보이지 않게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모든 부재들이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지붕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지붕마루와 추녀 마루는 양성을 하였고, 네 추녀 끝을 활주로 지탱하고 있다. 진남관은 조선시대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에 선조 32년(1599)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한 건물이다. 진남관은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세운 성의 중심 건축물로써 숙종 42년(1716)에 화재로 없어진 것을 숙종 44년(1718) 이제면 전라좌수사가 다시 세웠다. 1959년 5월 30일 보물 324호로 지정되었다가 그 중요성과 가치가 인정되어 2001년 4월 17일 국보 304호로 지정되었다. <출처:여수시청>


진남관 축소 모형. 자연석 주춧돌에 민흘리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주심포와 다포양식이 절충된 형식이며 2번째줄 기둥을 높게 세워놓고 있다.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
여수가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479년(성종10) 순천 내례포의 수군 만호영을 설치하면서 기존에 있던 해남의 수영을 '전라우도수영', 순천의 신설 수영을 '전라좌도수영'이라고 하면서부터다. 1593년부터 1601년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했던 여수는 조선시대 400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로서 구국의 성지로 전사의 사명을 다한 곳이며, 지금까지 이순신장군의 기백과 충정 정신이 도도히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고장이다. 전라좌수영성의 설치 당시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종실록>에 의하면 성종 21년 10월에 전라좌수영성을 수축하였는데, 당시의 규모를 둘레 5,634자(尺)라 했다. 또 1847년 기록인 <호자수영지>에서는 성주위가 3,158포척(布尺)이라 했다. 성종년간의 규모를 당시 영조척을 기준으로 산정하면 약 1.13km가 되는데 현재 성곽의 터로 실측된 1.74km와 약간의 차이만 있다. 이는 이후 설치되는 치나 옹성의 치수 산정 또는 측량방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여수시청>


지금의 여수시 구도심에 객사를 중심으로 성을 쌓고 있는 전라좌수영성 모형. 지금의 여수항과 주변 구도심 지역에 함선들이 정박해 있다.


뒷쪽에서 본 전라좌수영성 오동도입구에서 여수 구도심으로 들어가는 고갯길에 정문격인 성문이 설치되어 있고, 옹성을 쌓아 엄호하고 있다.


두정갑, 실제로 이순신장군의 갑옷은 남아 있지 않고 이순신 장군의 5대손으로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바 있는 이봉상(1676~1728)장군이 입었던 원수용 갑옷을 재현한 것이다. 진품은 현재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라좌수영 여수와 임진왜란
여수는 한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때문에 왜구의 침략경로에 노출되어 있어 왜구가 침략하기 시작한 고려말부터 수군기지화되다가 진례만호와 내례만호를 거쳐 성종 10년(1479)에 드디어 전라좌수영으로 승격되어 고종 32년(1895) 혁파되기까지 417년 동안 남해안 방어의 주력기지로 국방상 중요한 임무를 다했다. 특히 임진왜란때 여수의 좌수영수군은 이순신장군과 함께 바다의 모든 왜적을 겨파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하여 선소에서 거북선을 건조하는 한편 갖가지 병기를 시험하는 등 마치 왜적의 침입을 미리 알고 있는 듯 대비하였다.<출처:여수시청>


난중일기, 국보 76호, 난중일기는 이순신장군이 임진란 7년 동안 싸움터에서 손수 쓴 진중일기로 정조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서간첩, 국보 76호, 이순신장군이 친척들에게 친필로 보낸 편지를 수집하여 만든 책이다. 크기는 세로 33cm, 가로 44cm로 글씨는 한문 초서로 쓰여 있다.


임명장,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가 부하장교에게 직책을 수여하는 명령서


좌수영 수군의 서본, 전라좌도 수군이 쓰던 글씨 교본


철쇄방비시설. 이 방비시설은 전라좌수영의 동쪽 소포(지금의 종포)에서 건너편 돌산도까지 쇠사슬을 걸쳐 매어 적선의 야간통행을 막는 시설이었다. 우선 긴 쇠사슬의 중간중간에 큰 나무를 꿰어 부표로 사용하고, 이 쇠사슬을 바다에 가로질러 설치한 후 이것이 조류에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수면에 큰 돌을 달아매어 닻을 사용했다. <난중일기>에 '돌은 신생포(지금의 율촌)에서 떠왔고, 나무는 두산도(지금의 돌산)에서 베어 왔으며, 공은 거의 날마다 이 쇠사슬을 건너 매는 일을 감도했다."고 적혀 있다.


선소의 톱, 사조구.


독전기, 남소령기, 홍소령기, 조총, 화살과 화살통.


천자포, 황자포, 승자총통


여수 진남관. 출입문 오른편에 임난유물전시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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