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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연천 경순왕릉(사적 244호), 경주로 돌아가지 못한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능

younghwan 2012. 8. 2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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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군 장남면 임진강 나루터였던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이다. 신라를 고려에 넘겨 준 마지막 왕으로 신라왕릉 중에서는 유일하게 경주에서 벗어난 이곳에 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경순왕 사후에 경주에 묻힐려고 했는데, 고려 조정에서 경주지역 민심이 동요되는 것을 우려하여 운구행렬이 이곳 고랑포에서 막았고 이곳에 왕릉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경순왕릉은 고려와 조선시대 여러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관리가 되지 못하고 방치되었다가 영조대에 조선시대 왕릉의 격식에 따라서 재정비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신라 왕릉이나 조선 왕릉에 비해서 봉분의 크기도 작고, 능표.양석.장명등.망주석 등의 석물 또한 간소하게 마련되었다. 경순왕릉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휴전선과 가까운 민통선내에 위치하고 있어 방치된 측면이 있었으나 최근에 왕릉을 재정비하고 민간인이 자유롭게 경순왕릉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서울에서 1시간이내에 찾아 갈 수 있는 곳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문성왕의 6대손으로 어머니가 헌강왕의 딸 계아태우이다. 후백제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올랐다. 후삼국의 혼란기에 민심이 고려에 기울자 935년 고려 태조에 항복하였다. 태조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기도 했으며, 경주 사심관으로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경순왕은 김해김씨와 함께 우리나라 최대의 성씨를 이루는 경주 김씨의 실질적인 중시조라 할 수 있다. 경주 김씨는 김알지의 후손으로 신라 왕들 또한 그 후손이지만, 그 중 경주 김씨라 일컫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순왕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현재도 경주 김씨에서는 신라 왕릉 중 경순왕릉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연천군 장남면 군사분계선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경순왕릉. 경순왕릉은 경주로 시신을 운구하는 도중 고려조정에 의해서 임진강을 건너는 나루터인 고랑포 부근 언덕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왕릉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전란 등으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영조대에 왕릉의 격식에 따라 재정비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왕릉의 격식을 갖추었다고 하나, 문.무인석 등은 없으며, 간략학 재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릉 능표 탁본. 앞면에는 "신라경순왕의 능"이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왕(경순왕)은 신라 56대 왕으로 후당 천성 2년 무자(928년)에 경애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셨고, 청태 을미년(935년)에 나라를 고려에 넘겨 주셨다. 송 태평흥국 무인년(978년), 즉 고려 경종 3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경순이라 하고 왕의 예로 장단 남쪽 고부 8리 계좌 방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영조의 존호) 성상 23년 정묘년(1747년)에 다시 세우다."라 적혀 있다.


경순왕릉 능역 앞 마당. 참도나 홍살문 등을 설치해 놓고 있지 않다.


2009년 여름 경순왕릉.


경순왕 신도비로 추정되는 비석이 모셔진 비각


비석은 원래 고랑포구 주변에 있던 것으로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어 1987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비문의 내용이 많이 훼손되어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으며 단지 비석의 형태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경순왕릉비
이 비는 경순왕릉 신도비로 전해오고 있으나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으며, 또한 비문의 내용도 자연풍화 등으로 많이 훼손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다만 조선 영조 24년(1748)에 후손 김빈과 김굉 등이 경순왕릉 인근의 민가에서 비문의 내용이 <경순왕, 김, 십월여친지국, 경순왕이 10월에 고려에 손국하러 왔다는 의미임> 십 여자 정도 남아 있는 비를 발견하여, 이 비가 경순왕릉 신도비일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당시 비는 임진왜란 이후 경순왕릉의 관리가 소흘해 지면서 왕릉과 함께 방치되면서 실전되었다. 1973년 경순왕릉이 재발견되면서 경주김씨 중앙종친회의 노력으로 이듬해 고랑포마을 내에 방치되어 오던 비를 발견하고, 이를 고랑포 초등하교에 가져다 놓았다가 1978년에 현재의 위치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 비는 회백색의 화강암으로 귀부에 박혔던 부분은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십 여자의 명문이 남아 있다. 규모는 67cm, 두께 15~18cm, 높이 132cm이며 비신 윗부분 16cm부분에서 모죽임 하였다. <출처:연천군청>



경순왕릉 재실.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신라 경순왕릉 전경


경순왕릉 입구. 경순왕릉은 군사분계선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으며, 예전에는 제사 등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만 출입이 가능했으나, 지금은 사적지로 개방되어 있다.


경순왕릉 들어가는 숲속길


경순왕릉 입구.

신라 경순왕릉, 사적 244호,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경순왕(927~935:재위)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 휘는 부이며 46대 문성왕의 후손이다. 경순왕이 경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할 당시에는 국력이 쇠퇴하였다. 각처에서 군웅이 할거하였는데 특히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대세가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 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경순왕이 경종 3년(978)에 개경에서 세장을 떠나자 이 곳에 능이 마련되었으나 그 후 오랜 세월동안 실전되었다가 조선시대 영조 23년(1747)에 다시 찾게 되었다. 경순왕릉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소의 격식으로 재정비되어 능표.양석.장명등.망주석 등이 이 때 마련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경순왕의 운구행렬이 경주로 가기 위해 이곳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 왕실에서 경주지역의 민심을 우려하여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하는 이유로 운구행렬을 막았다고 한다. 결국 경순왕릉이 이 곳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 잡게 됨에 따라 신라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 되었다. <출처:연천군청>


경순왕릉 입구에는 최근에 조성한 묘역처럼 보이는 곳이 있다. 이곳은 경주 김씨 분파 중 2대 명문으로 손꼽히는 경순왕의 넷째왕자인 대안군파와 태사공파 중시조를 모신곳으로 보인다. 태사공 김인관은 고려 중기 문신으로 경순왕의 후손 또는 헌강왕의 7대손이라는 설이 있다. 고려 문종대 요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사공파 기념비


경순왕릉 부근에서 내려다 보이는 임진강.


임진강을 건너는 큰 나루터였던 고랑포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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