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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서울 용양봉저정, 정조가 한강을 건넌후 잠시 쉬었던 노량진나루터 정자

younghwan 2013. 2. 17.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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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는 인도교로서 첫번째로 건설된 한강대교는 한강 이남의 노량진과 강북의 용산을 연결해 주는 다리로 1917년에 준공되었으며, 1980년대까지는 제1한강교라고 불리웠다. 노량진에서 용산까진 강폭이 좁고 가운데 노들섬이 있어서 한강을 건너기에 가장 용이하였던 지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시흥.수원을 거쳐서 충청도.전라도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노량진 나루터는 경강의 4대도선장 중 하나로 교통량이 많았다고 한다.

 한강대교 남단 입구 언덕에는 용양봉저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한강을 내려보고 있다. 이 정자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 참배길에 한강을 건넌 후 잠시 휴식하던 곳이다. 앞면 6칸의 마루와 온돌방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숙식을 하던 행궁이라기 보다는 정조가 화성행차를 할때 한강을 건넌 이후 점심을 먹고 잠시 쉬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가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건설한 이후부터 용양봉저정이 있었다고 한다. 주변 노량진 나루터를 관리하던 관아 건물이 여러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이 건물도 한때는 식당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서울 용양봉저정, 서울 동작구 본동
이 정자는 정조 때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는 전후에 후식하던 주정소였다. 이후 여러 왕들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용양봉저정기>에는 1789년(정조13) 망해정을 구입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후 다시 지은 것인지, 이름만 용양봉저정으로 바꾸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정조가 이곳에서 주위를 살펴보고, "북쪽의 우뚝한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꿈틀하고 봉이 나는 것 같아 억만년 가는 국가의 기반을 의미하는 듯하다."라며 용양봉저정으로 이름 지었다. 건물은 정면6칸 측면 2칸이며, 내부는 마루와 온돌방으로 꾸몄다. 당시 주변에는 배다리를 관장하던 관아건물이 몇채 있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이 정자도 한때는 음식점으로 쓰일 정도로 훼손되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실린 <주교도>에는 당시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한강 남쪽으로 거동할 때는 용주를 타고 건넜다. 이 때문에 선창을 만들기 위해 배를 동원해야 했으므로 뱃사람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생부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지금의 융릉)을 수원으로 옮긴 정조는 한강의 흐름이 완만한 노량나루에 배다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정조는 강을 쉽게 건널 수 있었고 백성의 고통도 줄어 들었다. <출처:서울시청>


한강대교 남단 언덕에 위치한 용양봉저정.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 행차시 한강대교를 건넌후 점심을 먹기 위해서 잠시 머물던 공간이다. 정조는 이곳에서 잠시 쉰 후 장승배기를 지나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건물은 앞면 6칸 규모의 건물로 온돌방과 마루로 이루어진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건물이다.


노량진 나루터는 시흥, 수원을 거쳐서 충남, 호남지역으로 연결되는 주요한 교통로였으며, 한강 나룻터 중에서 통행량이 많은 곳 중 하나였다. 한강대교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건설된 인도교로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정조가 배다리를 설치했던 곳에 세워진 한강대교와 노들섬.


한강대교 남단 큰 길


노량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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