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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 유물전시관] 하서 김인후와 고암 양자징

younghwan 2013. 3. 1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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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서 김인후는 조선중기 문신이자 유학자로 전남 장성에서 출생하였다. 김인후는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학문을 닦았으며,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홍문관 박사 겸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면서 인종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종은 중종의 아들로 인품이 훌륭하고 학자들을 좋아했기때문에 연산군대 이후 중앙으로 진출한 사림출신 관료와 학자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병약하여 즉위 8개월만에 사망하였다. 김인후가 학문적 업적도 뛰어났지만 인종의 스승이었던 점이 당대 및 후대 왕들과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큰 동기가 되었다. 김인후는 인종의 사망과 을사사화 등으로 실망하여 고향인 전남 장성으로 낙향하여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당대 및 후대 학계에서 인종의 스승이었던 점을 크게 평가받아 성균과과 문묘에 모셔진 18명의 현인으로 추앙받았다. 그가 모셔진 필암서원을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도 살아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성 필암서원에는 하서 김인후와 함께 그의 사위이자 학문을 계승한 고암 양자징이 유일하게 배향되어 있다. 양자징은 당양 소쇄원 주인인 양산보의 차남으로 창평출신이다. 그는 김인후의 사위가 되면서 그의 제자가 디었으며, 그후 이황, 이이, 성혼 등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선조대에 관직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큰 벼슬은 하지 않고 여러 지방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김인후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 양자징의 당대부터 그의 학풍을 계승하는 인물로 여겨졌다. 정조대인 1786년 호남지방 유림들이 정조에 청하여 필암서원에 배향될 수 있었다.

하서 김인후의 생애
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은 공자를 모신 사당(문묘)에 신주를 모신 우리나라 18분 선정 가운데 한분으로서 중종 5년(1510) 장성현 대맥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요, 호는 하서 또는 담재이고, 명종 15년(1560) 51세에 돌아가셨다. 호남유림의 종장으로 추앙받았으며 22세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34세때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으며, 정조 20년(179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인후 선생은 열살 때 김안국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이황 등과 교우가 두터웠으며 세자 보도의 중임을 맡았다. 정조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문정이란 시호를 하사하였다.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선비들의 원한을 신원하였고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으로 돌아갔다. 그 후 모든 벼슬을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오직 성.경의 실천궁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논설과 의리가 명백했던 선생은 내실을 소흘하고 밖으로만 열심인 선비들을 호되게 꾸중했다고 하며 도의와 절개로 일관했던 선비의 표상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있는 문묘에 모셔진 우리나라 18명의 현인 가운데 유일한 호남출신으로 이 지방 유림들의 큰 어른으로 추앙받아 왔다. <출처:필암서원>


갓신, 하서 김인후 선생이 신었던 갓신, 의상, 고운 능라견으로 만든 사대부의 외출복. 1921년에 고증을 거쳐 만들어진 의상으로 복건과 부속의류는 실전하고 오직 이 유품만 전하여 옴. 193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지팡이, 하서 김인후 선생이 사용했던 지팡이


교지(왼쪽),1796년(정조20)에 김인후의 시호를 문정으로 한다는 내용의 시호교지. 교지(가운데), 1796년(정조20) 김인호의 시호를 문정으로 추증하고 품계를 정1품인 대광숭록대부로 올린다는 교지, 교지(오른쪽), 1796년(정조20) 하서 김인후에게 내린 추증교지. 이조판서에서 영의정으로 품계를 올려서 내려준 것임. <출처:필암서원>


상아휼, 조선조때 관원들이 임금님을 알현할 때 사용하던 것. 상아휼의 모양새는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형태로서 매우 귀중한 역사적 사료임.


책장, 당시 필암서원의 서루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서장, 고종대에 제작된 것을 추정됨


앞다지장, 일명 <반다지>라고도 불리는 조선시대 실내에서 많이 쓰던 수납장. 180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

각별했던 하서와 인종
하서와 인종은 각별했다. 하서는 인종의 세자 시절 세자를 모시고 공부하는 곳인 세자시강원에서 세자보도라는 직책으로 인종에게 글을 가르쳤다. 인정은 하서의 강의에 매료됐고, 의기가 상통하여 그 정표로 세자가 직접 친 묵죽도를 하사했다고 한다. 이 묵죽도 하단에는 하서가 지은 시가 적혀 있다. 인종이 재위 9개월만에 병사하자 그 충격으로 하서는 낙향하고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시작으로 마음을 달래며 후진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하서는 인종이 서거한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병을 가지고 집 남쪽에 있는 산에 올라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를 거듭해 밤을 지새고 내려오기를 평생동안 거른 일이 없었다고 한다. <출처:필암서원>


인종과 하서선생. 하서선생이 세자때 인종에게 학문을 교육하는 모습을 재현

하서의 문학과 예술
하서는 16세기 사림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시기에 도학자로서의 자기세계를 확고하게 살았던 지식인이었다. 그는 훈구관료들의 전횡에 반발하여 36세의 젊은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와 명분과 의리를 지켜 끝까지 현실에 나오지 않은 사실에서 그의 군자로서의 행동과 인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서는 1600여 수에 가까운 시를 남겼다. 16세기 호남에는 면앙정시가단과 성산시가단이 형성될 만큼 가사문학이 융성하였다. 하서 김인후는 면앙정 송순의 문인이며, 성산시가단 정철의 스승으로 시문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다. 이로 인해 면앙정과 소쇄둰 등 여러 정자와 원림에 그의 시가 남아 있다. 하서는 중국의 유명한 칠언율시 가운데 두 대구가 서로 잘 맞는 시 100수를 골로 음과 훈을 달고 한글로 번역한 '백련초해'를 짓기도 했다. <출처:필암서원>


하서선생 친필 액자, 필암서원 소장 그림


옥필가, 옥으로 만든 붓걸이. 붓의 보관상 기능과 함께 유풍 깊은 서온의 장식물 중 하나임. 영정조 년간에 필암서원에 이입된 유물로 추정. 인주함, 하서 김인후 선생이 사용했던 인주함.


옥필, 하서 김인후 선생이 사용했던 옥으로 만든 붓. 벼루, 하서 김인후 선생이 사용했던 벼루

평생을 바친 실천적 도학
하서 김인후 선생은 중국 송나라 정주학과 우리나라 포은 정몽주, 정암 조광조로부터 내려온 학통을 이어받은 도학자다. 소학, 대학, 중용, 효경, 서명, 역경을 평생 동안 연구하여 실천적 도학을 추구하였다. 우주관, 인성관, 수양론, 경세론, 의리론이 집약되어 있는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천명도 등을 저술하였는데 현재는 천명도만 남아 있다. 선생은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 예학에 밝았으며 필법은 진서, 초서, 전서, 예서에서 모두 극치를 이루었다 자연을 벗 삼아 당대 명사들과 교류하고 백화정, 훈몽재, 낙덕정, 소쇄원, 면양정, 식영정, 환벽당 등에 출입하여 한시와 부 등 1,600여수를 지어 전하여 오는데 경구와 고사를 많이 활용한 맑고 우아한 도학자로서의 인품을 잘 나타낸 주옥같은 시들이다. 국문학에도 조예가 높고 깊어 국문학 가단에서는  면앙정(송순) 가단에서 성산(정철) 가단으로 이어지는 중간적 역할을 하여, 국문학의 새 장을 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의 국문학시는 '자연가', '도임사수원가', '백구가' 등 3수가 있다. 선생이 저작한 '백련초해'는 고대의 명시 100수를 모아 국문으로 음을 달고 해설하여 쓴 것이다. 근대 어휘 475개와 고어 사전류에도 없는 어휘 21개, 희귀한 어휘 19개가 나타나 있어 국어 어문학적인 면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당시 학자들이 천시하던 '한글'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광해 2년(1610) 판각하여 필암서원에 보관하고 있다. <출처:필암서원>


압판, 문집을 널따란 나무에 새겨 종이에 박아내던 문집원판, 필암서원 부속 쇄경각을 두고 각종 경전, 문집, 경사 등을 영인한 기록이 있음.

호남사림의 형성
'호남'이라는 말이 전라도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불린 것은 조선초기까지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16세기 중반부터였다. 이 시기는 재지 중소지주로서 성리학적 소양을 강하게 지닌 사림이 향촌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로 호남학파 김식.최산두.양팽손.박상.고운.윤구.유운.유성춘.임형수.유희춘.송순 등 많은 인물들이 유배되거나 파직당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였으나 호남사림은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출처:필암서원>


하서 유묵 목판 일괄, 선조1년(1568)과 영조 46년(1770)에 새긴 목판.


광해군 2년(1610)에 새긴 '초서천자문' 18판과 '해자무이구곡'18판, 선조1년(1568) 새긴 '백련초해' 12판과 '유묵' 4판, 인종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판 3판

호남사림의 형성
하서는 호남의 풍요롭고 활달한 분위기와 낭만적 정조를 시가로 즐겨 나타냈던 호남가단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호남가단의 최초형성기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면앙정 송순의 가르침을 받았고, 호남가단을 완성시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송강 정철이 자신의 문하를 드나들었던 것에서 하서가 호남가단의 형성과 전개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짐작하게 된다. 호남가단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로는 면앙정의 주인공 송군과 이른바 식영정 사선으로 알려진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을 들 수가 있다. 하서의 국문시가 작품활동은 송순, 정철에 비해 다소 뒤지지만 한시 활동에 있어서는 양인을 훨씬 능가하였다. 하서가 단순히 도학자로서 재도문학의 굴레에 얽매였다기 보다는 호방하게 시화하는데 충실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호남가단의 활동 작품을 보면 <어암잡영> 20수와 <소쇄원 48열>과 <면앙정 30영>등의 자연시를 들 수 있다. <출처:필암서원>

고암 양자징(1523~1594)
본관은 탐라이며 자는 중명이고 호는 고암이다. 고암 양자징은 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둘째 아들로 창평에서 출생했다. 양자징은 5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피를 토하는 슬픔으로 병을 얻었고 8세 때까지 삼년상 동안 새벽부터 위자하여 근신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소학'공부를 철저히 하여 실천하였으며, 15세에 경사에 통달하였고, 침잠하여 홀로 이치를 깨닫고 연구해 감이 스스로 마음으로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서 김인후 선생을 뵙고 깊이 존경하여 그의 딸을 처로 맞아 들였다. 그 후 김인후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일취월장하여 학업에 더욱 더 정진하였다.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이와 성혼에게서 강의를 받았다. 선조때 감사 정종영이 천거하여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의영고직장, 거창현감, 석성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아들 양천경과 양천희가 기축옥사로 죽고 양자징도 옥살이하는 두아들의 옥바라지를 문제삼아 파직당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찬한 행장이 송자대전에 전한다. 정조 10년(1786) 호남의 선비들이 양자징을 필암서원에 배향할 것을 청하자 이를 예조에 물어 고암 양자징을 필암서원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그가 김인후 공의 사위로 학문의 정통을 이어받았고 또 퇴계와 율곡, 우계 등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니, 배향하더라도 의리상 안될 것이 없다. 더구나 문정공의 집안에 직접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개 하였고 또 그의 후손을 조정에 채용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에 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허락한다."고 하였다. <출처:필암서원>

하서 김인후와 고암 양자징의 관계
하서선생에게 조희문, 양자징, 기효간, 변성온, 노적, 남언기를 비롯한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대, 기대승, 김천일, 박순, 정철 등도 후배 문인으로 자처하였다. 하서 선생은 친분이 깊었던 양자징을 봐왔고 필암서원에 유일하게 스승과 함께 배향되어 있어 수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스승 김인후가 일찍이 자석벼루 하나를 양자징에게 주자 양자징은 그것을 잘 보관하여 가전의 보배로 삼으니, 세상 사람들은 복재 기준이 하서 김인후에게 붓을 준것과 동일한 아름다운 일이라 여겼다. 양자징이 쓴 장인이자 스승인 김인후의 행장에 따르면, "소자 자징은 문하에서 알아줌을 받음이 이미 후하였고, 또 음성을 들으며 직접 배운 것이 여러 해였다."고 하여 본인이 문하에서 가장 후한 스승의 사랑과 동료들의 격려를 받은 자자였다고 자평하였다. <출처:필암서원>


고암이 하서를 그리워하며 쓴 시. 의 사위이자 제자 양자징이 하서 선생이 돌아가신 후 행장을 썼는데 자신의 재주가 미치지 못함을 겸손해하면서 쓴 시.

구국대열에 앞장선 장성 선비들
연산군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반정군을 일으키자고 격문을 돌리는 등 정의를 위해 늘 앞장섰던 김개, 의리사상을 깊게 간직한 호남사림의 큰 맥을 이루게 했던 신평인 송흠이나 울산인 김인후, 청백리로 명성을 떨친 태인인 박수량은 모두 장성이 낳은 인재들이다.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 짓밟히고 백성들이 유린당할 때 의병에 앞장선 장성인들이 많았는데 김경수의 남문창의를 비롯하여 기효간, 기효근의 의병활동, 화차를 발명하여 행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변이중, 동래산성에서 적을 맞아 순국한 양산군수 조영규 등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크게 공헌했고, 입암산성에서 순절한 윤진의 충절은 장성인의 정신을 웅변해 주고 있다. <출처:필암서원>

호남유학의 학문적 특징
호남유학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이 지역으로 유배를 온 김굉필과 조광조였다. 김종직의 제자로 평생토록 '소학'만 읽었으며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한 김굉필은 무오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를 와 사사되기까지 4년 동안 있었는데 그동안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김굉필의 제자였던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되어 33일만에 사사당하였다. 그러나 호남사림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친구로, 또는 문인으로 교유하였으며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지역에서 죽음으로써 호남 유학이 도학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 시기 호남사림의 학문은 김굉필.조광조의 도학정치사상.지치주의 유학을 그 근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도학정치. 지치주의 유학의 특징은 조광조가 경연에서 주장하였던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를 일으킬 것에 잘 나타나 있다. 도학은 성리학과 거의 같은 의미로 도덕.윤리의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많이 사용하였다.지치는 삼대의 이상정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현을 본받아 이상적인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바른편에 서고 비판적인 언론을 편 사람들과 그러한 세상을 혐오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정치의 주변부인 호남지방으로 낙향 은거했다. 이러한 현상은 당쟁의 시기에도 계속되어, 호남지역은 유배지나 은거지로써 항상 많은 피해자와 은거자들이 선택하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이 고장에는 정의가 넘쳐 흐르게 되었으며, 그것은 호남지역 사람들을 지배하는 정서가 되었다. <출처:필암서원>


하서선생집


하서선생 행장, 하서김선생종향의, 하서초천자, 울산김씨 족보기사판필사본, 하서선생전


하서필집, 하서선생필적,


문계안, 보물 587-4,5호, 필암서원 강회 주관자 및 참가자들의 명단과 조약을 기록한 문서


필암서원집강안, 보물 587-3호, 조선 영조 28년(1752)~고종24년(1887)시이 원장, 원이, 진신장의, 유림장의, 색장, 향장의 등 필암서원의 소임을 맡아 보았던 사람들의 명부


필암서원 유물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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