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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서울 정릉(사적208호),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

younghwan 2013. 3. 10.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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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북동 북악산 뒷편 자락에 위치한 정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이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죽자 능을 덕수궁 부근에 자신의 능역과 함께 조성하고 원찰로서 흥천사를 세웠다. 그런 연유로 원래의 정릉은 조선이 건국하면서 처음으로 조성한 왕릉으로 고려 왕릉을 참조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왕자의 난으로 등극한 태종은 정릉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석재 일부를 청계천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사용하고 목재들을 태평관 건축에 사용하는 등 홀대하였다고 한다. 태종대에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었기때문에 그 이후 오랜기간동안 일반 무덤처럼 관리되었다고 조선후기 현종대인 1669년에 송시열 등이 계청으로 신덕왕후로 복권되면서 종묘에 배향되고 현재의 모습으로 재조성되었다고 한다. 처음 정릉을 조성했을때의 석물들은 장명등, 고석, 상석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그 중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 왕릉 중 가장 오래된 석물이라고 한다.

 신덕왕후는 고려시대 권문세족이었던 곡산강씨 일족인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중앙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최초로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방번, 방석 두아들과 경순공주를 낳았다. 왕자의 난 직전에 병환으로 죽자, 태조는 경복궁에서 가까운 덕수궁 부근에 정릉을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세웠다. 태조가 신덕왕후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반발한 전처 소생 왕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방번과 방석이 살해되고, 이후 태종은 신덕왕후를 평민으로 강등하고 능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원래 조선시대 왕릉은 상당히 넓은 지역을 능역으로 삼고 출입을 금하였는데, 정릉은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정하고, 권문세가들이 능역 숲에서 나무를 베는 것을 허락하는 등 조선후기 신덕왕후가 복권되기전까지 상당히 홀대하였다고 한다. 원찰이었던 흥천사 또한 조선초기까지는 수도 한양의 큰 절로 계속유지되었으나, 연산군대에 화재로 소실된 이후 쇠락하였다고, 정조대에 현재의 위치인 정릉 입구 부근에 중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태조가 흥천사를 세우면서 만든 흥천사종이 원래의 위치와 가까운 덕수궁 경내에 남아 있다.

정릉, 사적 208호
정릉은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신덕왕후는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현비가 되었고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왕후가 태조 5년(1396)에 돌아가시자 능을 꾸미고 그 이듬해 능 이름을 정릉으로 정했다. 이 능은 원래 중구 정동에 있었으나 태종 9년(1409) 2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후 능을 돌보지 않아 처음의 모습을 잃었으나 현종대에개축하여 다소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덕왕후의 신위도 태조묘에 모시게 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서울 성북구 정릉로 북악산 북동쪽 자락에 위치한 신덕왕후 능인 정릉. 원래는 덕수궁부근에 있었는데, 왕자의 난으로 등극한 태종이 신덕왕후를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능은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의 정릉은 조선후기 현종대에 신덕왕후가 복권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고 한다.


정릉 들어가는 길. 정릉은 서울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종이 주변에 주택이 들어설 수 있도록 했기때문에 지금도 주택가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 앞에는 바깥세상과 능역을 구분해 주는 금천을 조성하고 금천을 건너는 돌다리를 세우는데, 정릉은 자연지형을 잘 활용한 돌다리인 금천교를 볼 수 있다.


정릉 앞을 흐르는 금천. 자연하천을 금천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릉으로 들어가는 길. 조선후기에 왕릉으로 복구되었기때문에 숲이 잘 조성되어 있다.


정릉 홍살문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들어가는 참도. 정릉은 자연지형에 맞추어 참도가 'ㄱ'자형으로 되어 있다.


정릉 정자각.


장자각 내부


제수진설도, 제향일정은 매년 9월 23일(양력)이다.


정자각 월대


정자각에서 내려다 본 정릉 능역


정자각 오른편에 있는 수복방.


수복방 안에 전시되어 있는 왕릉 제관의 복장


왕릉 앞 비각


능은 조선후기에 복원되기는 했지만, 원래 태조가 조성했던 모습은 아니다. 왕릉 석물 중 장명석은 고려 공민왕릉 석물을 참조하여 만들었으며, 조선시대 처음으로 만들어진 왕릉 석물로서 가치가 있다.


정릉 안쪽 숲. 도심 주택가 주변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걷기 좋은 숲이다.


옛 재실터에 남아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정릉 앞 마을에 있는 고목


정릉 입구 주택가.


정릉 앞 주택가 시장


덕수궁 경내에 있는 흥천사종. 보물 1460호로 지정된 흥천사종은 태조가 1462년 신덕왕후를 위해 왕실에서 발원하여 만든 것이다. 중국종의 특징이 전통 범종 양식에 반영된 것으로 '흥천사'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흥천사와 원래 정릉이 있었던 덕수궁 부근 정동길. 현재 이름인 '정동' 또한 정릉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초 이곳은 능역으로 주택이 들어설 수 없었으나 태종이 당시 세도가들에게 주택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상으로 좋은 터로 여겨졌기때문에 조선초 풍수에 능했던 대표적인 인물인 하륜이 주도하여 권문세가들이 이곳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정릉 입구 동쪽편 언덕에 위치한 흥천사. 원래 흥천사는 태조가 발원하여 정릉의 원찰로 세운 사찰로 원래 덕수궁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연산군대에 화재로 소실한 이후 크게 쇠락하였다. 현재의 사찰은 정조대에 절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크게 중창한 것이라 한다.


'왕자의 난'으로 등극한 태종이 계비였던 신덕왕후를 미워했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청계천 광통교의 '신장상' 원래 정릉을 구성하는 석물 중 하나로 병풍석이었다고 한다. 태종은 수해를 입은 광통교를 복구한다는 명분으로 정릉 석물을 광통교를 복원하는데 사용하였다. 고의로 신장상을 거꾸로 세워놓고 있다.


 



* 참조: 문화재청, 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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