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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화성 당성(사적 217호), 당항성이라 불렸던 신라의 대외 창구

younghwan 2013. 4. 1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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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항성이라고도 불리는 당성은 수원 서쪽 대부도 부근 해안지역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소재하고 있는 산성이다. 당성은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포용하여 대략 삼각형에 가까운 형상으로 석루를 돌렸으며 소규모나마 포곡식 산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삼각형의 2변에 해당되는 서북.동북면은 능선을 이용하여 구축하였는데 석축이 형태는 잘 남아 있느나 표면은 흙과 잡초가 덮혀 마치 토루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서북 능선을 통과한 부분의 석축은 거의 잡초와 작은 수목이 우거진 토축처럼 바뀌어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1,200m로 산성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당성이 위치한 화성군 남양지역은 원래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한 이후 당성군이라 불렀으며 조선 태종때 전국의 지방조직을 정비하면서 남양도호부가 설치되었다. 당성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성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하면서 중국 당나라와 뱃길을 열었던 중요한 항구였으며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당성내에서는 발굴조사 결과 신라가 당성을 점유하기 시작했던 6~8세기의 유물이들이 주로 출토되고 있다. 성벽은 원래 산봉우리를 둘러 쌓은 소규모 테뫼식 산성이었으나 점차 규모를 확장하여 계곡까지 포함하는 포곡식산성의 형태로 바뀌게 된다. 성내부에는 식수를 공급하던 우물터와 건물터, 서쪽 봉우리 주변에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장대인 망해루 건물터가 남아 있다. 당성이 있는 구봉산은 해발 165.7m로 낮은 봉우리이지만 서해안 제부도, 대부도 주변 바다와 남양지역을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으로 산성둘레가 1.2km정도로 그리 크지 않기때문에 산책하는 것처럼 산성을 편하게 한바퀴 둘러볼 수 있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구봉산 정상과 동쪽 계곡과 능선에 성벽을 쌓은 화성 당성. 서해안 가까이 수원-대부도간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 삼국시대 성으로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중국과의 뱃길을 열었던 역사적 의미가 큰 산성이다.

당성, 사적217호,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이 성은 남양반도의 서신.송산.마도면의 경계가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에 위치한 구봉산 정상부와 동향한 계곡 및 서남쪽 능선에 성벽을 쌓았다. 이것에서는 북서쪽으로 화량진성, 북쪽으로 해운산 봉수, 서남쪽으로 염불산 봉수, 남쪽으로는 백곡리산성, 청명산성 등 많은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지역은 처음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하였으며,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하였는데 이곳은 서해바다를 건너 중국과 교통하는 출입구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성벽은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가장 먼저 쌓은 성벽은 테뫼식으로 쌓은 삼국시대 성벽으로 둘레는 363m이다. 기단 바깥쪽에 보축을 하여 성벽의 안전성을 도모하였다. 성내에서는 6~8세기의 유물들이 주로 출토되었다. 두번째 성벽은 이 성벽의 중간부를 관통하며 장방형의 포곡식 성벽으로 둘레는 1,148m이다. 지금까지 이 성벽의 내성으로 알려져 왔으나 발굴조사 결과 정상부의 테뫼식 산성의 협소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통일신라 말기에 재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벽은 신라 하대의 당성진 설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성내에서 출토되는 통일신라 말기의 유물들이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 수구터의 안쪽에는 지금도 샘이 있어 물이 사철 나오고 주변에 건물터가 있다. 서벽에 인접한 정상부에는 오래된 나무와 우거진 숲이 있는데, 이곳을 발굴 조사한 결과 망해루터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나왔다. 당성의 진입로 입구에는 당성사적비가 있으며 이곳에서 성내로 진입하면 넓은 평탄대지가 나타난다. 그후 조선시대에도 성을 고쳐 쌓은 흔적이 보인다. 삼국시대부터 대중국 항로의 기착지로서 역사적인 중요성이 매우 큰 유적이다. <출처:화성시청>


당성입구와 사적비. 당성은 동쪽으로 계곡이 열려있는 포곡식 산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산성 내부로 들어가는 길


산성 북동쪽 능선을 따라서 쌓은 석축


산성 남동쪽 능선을 따라서 쌓은 산성. 현재의 산성은 대체로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한 이후 원래 봉우리 주위에 석축을 쌓았던 테뫼식산성이었던 것을 계곡 방향으로 확장하여 포곡식 산성 형태를 보이고 있다.

우물지
당성 내부의 식수를 공급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의 옛 터이다. 당성 서쪽 계곡부의 평탄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름 약 50cm, 깊이 약 1m로 비교적 작은 규모이다. 우물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땅을 파고 주변에 돌을 쌓아 올렸는데, 특히 안쪽은 다듬어진 장방형 돌을 이용하여 각을 조금씩 줄여 쌓아 올렸다. 199년 발굴조사에서 우물지 동편으로 대규모의 건물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통해 우물지가 위치한 곳이 당성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화성시청>


산성내부에서 발견된 우물터. 지금도 우물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다.


우물터 동쪽편 평탄한 지형에 남아 있는 건물터.


당성 남쪽 능선을 따라서 이어지는 성벽


남쪽 능선 성벽에서 보이는 동북쪽 능선을 따라 쌓은 석축


당성 서남쪽으로 중국과의 뱃길이 열렸던 남양만과 서신면 일대가 내려다 보인다.


당성 남쪽 능선을 따라서 이어지는 성벽


남양만 포구에서 당성으로 출입하는 성문이었던 당성 서문 주변 성벽


능선을 따라서 쌓은 석축


당성 서문터


당성에서 서해바다가 보이는 구봉산 봉우리 주변 망해루지로 오르는 성벽길


당성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성벽. 안쪽에 조선시대 장대인 망해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있다.

망해루지(추정)
서해도서와 해안이 조망되는 당성의 가장 높은 지점인 구룡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던 누각인 망해루의 옛 터이다. 목은 이색(1328~1396)이 지은 '남양부 망해루기'에 의하면 고려말 남양부사 정을경이 고을의 치소에 외관을 웅장하게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2001년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계단 및 담장지가 확인되었다. 확인된 장방형 건물지는 장축 11m, 단축 8m이며, 조선시대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한편 유구 노출과정에서 인화문 토기류와 고식의 기와들이 확인되어 1차성벽(석축성벽, 통일신라)과 관련된 건물지가 중복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출처: 화성시청>


당성 서쪽 구봉산 정상에 남아 있는 망해루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망해루 부근 성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서해안. 멀리 대부도와 주변 해안이 보인다.


당성 서북쪽 시화호 주변


망해루지에서 서북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성벽. 망해루지 부근에서 석축이 끊어지고 마치 잡초가 뒤덮힌 토축성처럼 보인다.


서북쪽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길. 석축이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다.


당나라와 교류했던 당성의 역사적인 의미를 강조하여 당성 탐방로에 '실크로드 탐험대 탐방로'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있다.


당성 동쪽 화성지역


당성 북문터


석축이 붕괴되어 마치 토축성처럼 보이는 북쪽 능선


동쪽편 계곡이 가까워지면서 다시 성벽 석축이 이어지고 있다.


산성 내부 돌무더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옛날 봉우리 주변으로 석축을 쌓았던 테뫼식 산성의 흔적으로 보인다.


북동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성벽


북동쪽 성벽에서 본 당성 동쪽 계곡 부근의 성벽


남쪽편 서신면 지역에서 본 당성이 있는 구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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