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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박물관] 대구.경북의 유교문화, 사림과 서원

younghwan 2013. 5. 11.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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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한 이후 중앙관료로 진출하지 않고 지역에서 영향를 갖고 있던 향리세력들은 점차로 중소지주로서 경제력을 축적하면서 학문적인 역량도 갖추게 되었다. 특히, 성종대에 길재의 학문을 이어받은 김종직을 필두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의 영남출신 사림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기존의 중앙 훈구세력을 충돌하여 여러차례 사화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명종대에 이르러 사림은 조선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16세기 명종대에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들은 다양한 학파를 형성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논쟁을 생겨났다. 이런 농쟁의 결과로 서경덕.이황.조식.이이와 같은 탁월한 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를 이끌 성리학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게 된다.

 영남지역은 김종직을 비롯하여 사림들의 출신지로 다른 지역보다 활발한 모습을 보인다. 영남지역 출신 선비로는 김종직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인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이황, 조식 등의 학파를 형성하면서 많은 후학들이 조선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순흥에 성리학을 소개한 고려시대 유학자 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이 처음 세워진 이래로 영남지역에서는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을 모신 서원들이 곳곳에 세워졌다.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퇴계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 류성룡을 모신 병산서원,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 정여창을 모신 남계서원,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 등이 있다.

대구.경북의 유교문화
유교. 유교는 중국 춘추시대 공자(기원전 551~479년)가 개창한 사상이다. 공자는 가족주의를 바탕으로 사람들 사이에 신뢰와 사랑이 충만한 대동사회의 실현을 꿈꾸었다. 이러한 공자의 소망은 인륜질설르 자각하는 마음가짐인 '仁'과 그런 마음가짐을 실천하는 방식인 '禮'로 구체화하였다. 공자의 가르침은 중국 곳곳에 전해져 한나라 무제 때 국가의 공식적인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송나라 때 주희는 우주만물은 '理'라고 하는 불변의 원리와 '氣'라고 하는 가변적인 요소가 작용하여 생겨나고 존재하며 소멸하고(이기론), 우주만물이 하나인 사람에게 내재된 선한 본성을 '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仁義禮智를 실천하는 도덕적인 삶은 개인적인 수기인 수양과 진리탐구에서 시작하며, 일상에서 지켜야 할 윤리로 삼강오륜을 제시하였다. 즉, 인의예지를 실현하는 개인의 도덕적인 삶이 기초가 되어 도덕적 가정과 도덕적 사회, 나아가 도덕적 천하를 이룩할 수 있다(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고 하였다. 유교의 전래와 정착. 유교는 우리나라에 삼국시대를 전후하여 한자와 함께 전해져,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정치적 운영원리로 중시되어 제도적인 측면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고려 말에 안향(1243~1306년)이 중국으로부터 주자학을 근간으로 하는 성리학을 도입한 후, 조선의 건국과 함께 유교를 국가 운영의 기본 이념으로 삼아 중요시하였다. 이후 유교는 정치이념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 영향을 주며 발전하였다. 유교와 서원. 안향은 순흥(영주시 순흥면) 출신으로,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안향을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한 백운동서원은 명종 대에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이다.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한 퇴계 이황(1501~1570년)은 서원의 진흥을 통한 유교 교육의 강화를 제시하여 전국적으로 서원건립이 확산되었다. 서원을 중심으로 한 사림들의 활동은 조선 유교의 다양한 발전과 변모를 촉진시켰다. <출처:대구박물관>

영남의 사림과 서원
영남지역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선비들이 활동이 활발했다. 16세기의 사화기에 훈구.척신세력에 대립한 재야사류로서 사림파는 김종직을 중심으로 하여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이황, 조식 등 영남 출신의 선비들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사림의 활동은 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서원은 선현에 대한 봉사와 유생의 교육이라는 두 기능을 담당한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파가 정치의 주도권을 차지한 이후에는 더욱 확대되어갔다. 서원은 단순한 사림의 교학기구에만 그치지 않고 강학활동을 매개로 하여 향촌 사림 사이의 지면을 익히고 교제를 넓히는 기능뿐만 아니라 향촌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에 관한 의견교환이나 해결책을 논의하는 향촌운영기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서애선생문집, 조선 19세기, 조선중기 문신이자 이황의 문인인 서애 유성룡의 문집으로 1633년에 아들 진이 간행하였다. 서애는 임진왜란 중 민정.군정의 최고관직을 지내면서 전시에 조정을 이끌고, 각종 시무책을 제기했다. <출처:대구박물관>


퇴계선생 문집, 조선 19세기, 조선중기의 대학자이며, 영남학파를 주도했던 퇴계 이황의 문집이다. 퇴계는 율곡 이이와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출처:대구박물관>


퇴계 선생을 모신 안동 도산서원


서애선생문집, 조선 19세기, 조선중기 문신이자 이황의 문인인 서애 류성룡의 문집으로 1633년에 아들 진이 간행하였다. 서애는 임진왜란 중 민정.군정의 최고관직을 지내면서 전시에 조정을 이끌고, 각종 시무책을 제기했다. <출처:대구박물관>


서애 류성룡을 모신 안동 병산서원


회재선생문집, 조선 19세기, 조선중기 문신이자 유학자인 회재 이언적의 유고집으로 손자 준이 편찬.간행하였다. 그의 '주리'학설은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무극태극 논쟁에 크게 기여했다. <출처:대구박물관>


회재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


점필재선생문집, 조선 19세기, 점필재 김종직의 문집이다. 김종직은 영남학파의 종조로 불린다.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의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 일으켰고 그로 인해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이후 중종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출처:대구박물관>


내암 전인홍 선생 문집


남명선생문집, 조선 19세기, 조선중기의 학자 남명 조식의 시문집으로 1764년(영조 40) 박정신 등이 간행하였다. 조식은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물을 주장하였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출처:대구박물관>


한훤당 김굉필 신도비명 탑본,
대구 달성군 도동서원에 있는 비석 탑본으로 한훤당의 생애와 관직, 후손, 업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석은 김굉필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앞 후손과 지역사림, 경상감사 등이 협력하여 세웠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408년 무오사화 때 평안도 유배 시절 조광조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1610년(광군2)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에 배향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출처:대구박물관>


대구 달성 도동선원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


소학언해, 조선 18세기, 일상의 실천적 수양에 관한 내용을 담은 유학 수신서이다. 도덕적 실천을 강조한 조선시대 사람들이 특히 중시했다. 김굉필은 일생동안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다. <출처:대구박물관>


경현록, 조선 18세기, 한훤당 김굉필과 매개 조위의 전기 및 저작집이다. 뒤에 정구가 매개의 사적을 빼고 증보하여 한훤당의 사적만을 모은 것이다. <출처:대구박물관>

도가 동쪽으로, 도동서원
도동서원(사적488호)은 앞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조선중기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형식에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이 잘 드러난다. 공간구성은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구분된다. 진입공간은 외삼문과 누각이 있고, 강학공간 내에는 강당, 동재, 서재, 장판각 등이 있으며, 제향공간에는 사당이 있다. 특히 강학공간 출입문인 환주문은 그 구성이 특이하며, 담장은 아름다운 토담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1568년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사우를 지어 향사를 지내오다가 1573년 쌍계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 1579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 1605년에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다시 짓고 보로동서원이라 하였다가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주요 서원 중의 하나이다. <출처:대구박물관>


김굉필을 모신 달성 도동서원


일두선생유집, 1911년,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일두 정여창의 문집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인해 유배형에 처해져 숨을 거뒀다. 광군대에 김굉필과 나란히 문묘에 배향되어 동방오현으로 추앙되었다. <출처:대구박물관>


한강선생 문집, 20세기 초,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한강 정구의 문집이다. 한강은 김굉필의 외증손이며, 조식과 이황의 문인이었다. 경학을 비롯한 산수, 풍수에 뛰어났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다. 도동서원의 중건을 주도하였으며, 1678년에 도동서원에 추가 배향되었다. <출처:대구박물관>


현풍곽씨 편지, 조선 17세기, 곽주가 부인 하씨에게 보낸 편지이다. 한훤당의 제사를 지내러 가기 위해 소지품을 미리 챙겨 보내라는 내용이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국가에서 한훤당 제사를 주관하였고, 이떄 각 고을 혹은 해당 고을의 선비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출처:대구박물관>

"내일 새벽에 한훤당의 제사를 나라에서 명하여 행하시고, 우리에게 그 제사에 참여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소례로 도로 나가니, 내 철틱하고 두건하고 한슈가 가져간 낡은 명주 줄치막하고, 이불 베개 포대기 빗접 수건 갓보에 든 새자리보를 한 곳에 싸서 년슈로 하여금 오늘로 소래 못골로 보내소. 나는 내일에야 갈 것이오." <출처:대구박물관>


소수서원 현판, 복제품, 조선 1550년, 소수박물관 소장, 1549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건의로 사액 받은 뒤 1550년에 명종이 직접 글씨를 써서 하사한 현판이다. 현판 오른쪽에는 영종의 어필임을 기록한 글씨와 왼쪽에는 1550년 4월 어느 날에 임금이 직접 써서 이름을 지어 내렸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출처:대구박물관>


회헌선생실기, 1909년, 안향의 유문과 그와 관련된 여러 사실들을 모은 책이다. 안향의 17대 후손인 안극권이 조선 용조 40년(1764)에 처음 간행한 이후 여러 차례 증보.중간하였다. <출처:대구박물관>


안자포적촬요, 1906년, 안향의 행적과 후대에 봉사한 축문 등을 이상영이 여러 문헌에서 뽑아 엮은 책이다.


죽계지, 조선후기, 죽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의 창건과 배향된 인물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여 엮은 것으로 1544년에 주세붕이 편찬하였다.


안향 초상, 조선후기, 회헌 안향(1243~1306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원나라에서 주자의 저술을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보급하였다. 회헌이라는 호는 그가 흠모하던 주자의 호인 회암을 모방한 것이라 한다. <출처:대구박물관>


여도, 회화식으로 그려진 전국 고을지도를 모은 책이다. 지도의 뒷면에는 해당 고을의 인구수, 호구수 등 지방행정에 관한 정보가 적혀 있다. 이 가운데 '순흥부'에 소수서원이 '백운동서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출처:대구박물관>

사원에서 서원으로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숙수사터에 세워졌다. 절터에 서원을 조영하였다는 사실은 사원에서 서원으로 옮겨가는 시대적 전환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조선 중종 대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순흥 출신의 고려시대 유학자인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1543년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의 요청에 의해 명종 5년(1550)에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뜻의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화를 면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안향과 안축, 안보, 주세붕을 배향하며, 매년 3월과 9월에 향사를 지낸다. <출처:대구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영주 소수서원

숙수사 터에서 나온 불상
숙수사는 신라 때 창건된 사찰로 전해지며, 소수서원이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폐사되었다. 불상은 1953년 소수서원 뒤편에 신설된 소수중학교 건립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현재 당간지주와 불상대좌, 광배 등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발견되 불상은 모두 25구로 제작 시기는 감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며, 종류도 부처상, 보살상, 반가사유상, 탄생불, 신장상, 공양자상 등 매우 다양하다. <출처:대구박물관>


탄생불(신라 7세기), 반가사유상(신라 7세기)


부처(신라 7세기), 보살(신라 7세기), 부처(통일신라 8세기)


공양자(통일신라 9세기), 신장(통일신라 9세기)


삼존불(통일신라 9세기)


부처(통일신라 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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