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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박물관] 여자복식과 꾸미개, 바느질 도구

younghwan 2013. 5. 22.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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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복식에 대한 문헌기록은 북쪽지방인 숙신.옥저 등에서 가죽옷을 입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벽화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입었던 복식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 등작하는 복식에서 동호 복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부분도 보이기도 하는데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로 상당히 국제적인 면모를 보인다고 한다. 우리나라 복식은 기본적으로 앞이 열려 있는 형태로, 기본적을 바지.저고리.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모를 중요시하는 전통이 있다. 이는 거의 2천년동안 변함이 없는 특징이기도 하다. 고구려 벽화등에서 보여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저고리 형태는 조선초까지 변화가 없었으나 16~17세기를 거치면서 깃, 소매, 길이 등이 급격히 작아지는 오늘날의 한복과 비슷한 형태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현대인들이 입는 한복은 구한말까지의 한복과는 또다른 개화기 이후 특성을 반영하여 다양했던 종류의 한복들이 간소화되고 서구문물이 반영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시.주 중 하나인 의복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테나여신이나 동아시아에서 국가적으로 실을 잣고 베를 짜서 옷감을 만드는 일은 여자들에게 매우 중요했던 일이자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던 중요한 노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많이 볼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던 70~80년대까지도 일반가정에서는 재봉틀을 완비하고 여자들이 바느질로 옷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 중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대구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통복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옛 사람들이 일생의 중요한 행사에 입었던 전통복식들을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과 바늘의 조화
우리옷, 유행의 역사. 우리 옷의 기본 구조는 저고리, 바지, 치마, 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주변국가의 영향을 받으면서 부분적으로 변화가 있었으나 기본적인 구조는 큰 변화없이 유지되었다. 조선시대 전까지는 대체적으로 저고리 길이가 허리 아래로 내려오는 정도이며, 고름 대신 허리띠를 저고리에 둘러 입었다. 여성의 경우 상의를 먼저 착용하고 그 위에 치마를 입기도 하였다.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중국 복식의 영향도 나타났다. 중국 복식을 정식으로 받아들인 것은 7세기 중반의 신라시대로, 관복제도가 이 시기에 처음 수용되었다. 고려시대 원의 침략기에는 우리 옷에 있어서 큰 변화를 맞는 시기였다. 이 시기 몽고풍의 유행은 매우 커서 조선시대까지 그 흔적을 남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복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남성들의 포는 더욱 다양해지고, 임진왜란을 경계로 저고리와 포 형태의 변화가 뚜렷해졌다. 개화기 이후에는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한복과 양복이 혼용되는 변화가 일어나고, 소재와 형태에 서양적인 요소들이 반영되었다. <출처:대구박물관>

시대의 유행 아이콘 저고리
저고리는 한자로는 유, 삼, 오라고 하며 '저고리라는 말은 세종2년 (1420)에 '赤古里'라는 표기로 처음 등장한다. 고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다양한 형태의 저고리가 유행하였는데, 저고리 형태와 길이의 변화는 몸의 실루엣과도 많은 연관성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길에 허리띠를 묶어 입었고, 대체적으로 조선시대 초까지만 해도 몸을 감싸는 풍성한 형태였다. 조선시대 16~17세기의 저고리 형태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다가, 18세기에 이르면 깃, 소매, 길이 등이 급격히 작아져서 몸에 밀착되는 짧은 저고리가 유행했다. 이러한 유행은 18세기말에 가장 정점에 달하였다. 치마는 풍성하게 부풀어진 형태로 마치 항아리와 흡사한 실루엣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덕무는 이러한 당대 여성들의 유행에 대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글을 남겼다. <출처:대구박물관>

" 대체로 의복을 장식하는 것이 그 시대의 양식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다 창기들이 여우같이 아름답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인데 세속 남자들이 그 아름다움에 빠져 이를 깨닫지 못하고는 그 아내나 첩에게 권하여 이를 모방하여 본받게 해서 서로 전하여 익히게 된다."


작은꽃무늬누비저고리, 조선 16세기 후반 ~17세기 전반


연꽃넝쿨무늬저고리, 조선 17세기


장저고리, 조선 16세기


무덤에서 나온 옷, 출토복식
조선시대에는 관의 빈공간을 채우기 위해 죽은 이의 옷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옷가지들로 채우는 수례의 풍습이 있었다. 실제로 조선시대 무덤에서 나온 옷을 보면 평소 입었음직한 옷가지들이 많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 많은 양의 옷가지들을 어떻게 마련하는 것일까. 이것은 죽은 이의 사회적 위치가 그 해답을 말해준다. 죽은 이의 경제려과 신분에 따라 옷의 소재와 수량이 달라졌으며, 남녀에 따라서 옷의 구성에서도 차이가 나타난다. 이러한 출토복식은 대부분 무덤을 이장할 때 수습되는데 시대적으로 조선시대, 신분적으로는 사대부계층으로 한정된다. 이는 화장하지 않고 매장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장례법이었으며, 예법에 따라 제대로 매장법을 지킨 것이 사대부계층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중관에 회곽을 사용한 정교하고 튼튼한 구조의 무덤에서만 출토복식이 발견되다. 이러한 무덤에서는 옷뿐만 아니라 부장품들도 함께 발견되는데, 이들은 문헌기록을 통해서만 보았던 당시의 복식문화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대구박물관>


연초록 저고리와 보라색 무명바지를 해 입히소. 곽주가 아내에게, 조선 17세기 중반
"소례에서 '아기네를 데려 오라'고 하시더라 하니 녕내와 덕녀를 못 데려 갈지라도 설네는 데려 가게 하소. 입은 것이 하도 없으니 연초록 물든 것으로 저고리를 하고, 슬개가 짜는 명주를 제 장옷 할 만큼난 떼어서 자주색 물을 들여 장옷을 하고, 보라색을 가는 무명에 물들여 바지까지 하여 입혀 데려 가세 하소. " 편지에서는 딸아이 철녜를 소례의 할머니댁에 데려갈 때 입히고 갈 외출복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남편 곽주는 연초록 물든 저고리, 자줏빛 명주 장옷, 그리고 보라색으로 물들인 무명바지를 해 입히라 한다. 저고라, 치마에 장옷 차람은 일반 성인들의 외출복이며, 여자 어린이의 외출복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된다. 바지를 보라색으로 곱게 물들이라고 한 것은 겉옷으로 입히기 위한 것으로 추측되며, 철네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갓난아이로 치마없이 풍차바지 같은 유아용 바지를 착용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연초록, 자줏빛, 보라색 등 다양한 색으로 옷을 염색하여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대구박물관>


운혜(조선 18세기), 소모자(대구 달성 진주하씨 묘, 조선 17세기)

진주하씨, 대구 달성, 조선 17세기. 지주하씨는 현풍 곽씨의 19세손인 곽주의 두번째 부인이다. 1989년 4월, 현풍 곽씨 문중에서 무덤을 옮기는 과정에서 저고리와 장옷 등 의복류 81점과 그의 남편 곽주가 진주하씨에게 쓴 편지 등 서간문 172점이 발견되었다. 부인의 옷과 편지는 후손들에 의해 국립대구박물관에 기증되어 전시와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17세기 중기의 복식사 연구뿐만 아니라 한글로 쓴 서간문들은 당시의 언어와 생활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대구박물관>

외출, 그 설레임
조서신대 여성들은 가능한 외출을 삼가고, 집 밖을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에는 가마를 타거나 내외용 쓰개로 가리고 다녔기 때문에 남성들의 포와 같은 겉옷이 발달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성들의 경우 실내는 물론 일상시에 포를 입는 것이 예의인 반면, 여성들의 경우는 실내에서 포를 착용하지 않는 것이 예의에 맞는 것이 되었다. 여성들의 대표적인 겉옷은 장옷, 두루마기를 들 수 있는데, 외출용 겉옷으로서 두루마기를 입게 된것은 개화기 이후의 일이었다. 여름에는 모시나 삼베, 봄.가을에는 명주나 무명을 사용했다. 겨울에는 단 직물을 사용하여 솜을 넣고 누벼서 만들기도 하였다. 특히 겨울에는 조바위나 아얌, 풍차 등을 함께 착용한다. <출처:대구박물관>


청자상감운학문유병(고려), 청자상감모란문합(고려), 여성들이 사용하는 분이나 향을 담아두던 그릇이다. 모란은 꽃중의 왕이라고 하며 부귀와 아름다움이라는 특성 때문에 특히 여성과 관련되는 물건들에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다.


빗접, 조선후기


아얌, 20세기 전반, 아얌은 조바위와 함께 조선시대 말에 생긴 여성용 방한모이다. 예복을 갖추지 못했을 경우 예모를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했다. 귀를 덥지 않고 머리 윗부분만 감싸는 형태로 아얌의 뒤에 큰 댕기를 늘어뜨린다. <출처:대구박물관>


풍차, 20세기 전반, 흑색 단으로 만들고 검은색 토끼털을 돌려 장식한 단순한 형태으 풍차이다. 남녀 모두 착용하는 것으로 여성들의 경우 앞부분에 술과 구슬끈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남성들은 풍차를 착용하고 그 위에 사모나 갓을 쓴다. <출처:대구박물관>


장옷, 조선 20세기, 장옷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는 쓰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중기까지 장옷은 여성들의 대표적인 겉옷이었다. 내외용 쓰개로 사용된 겉옷용 장옷과 구성은 같으나 길이와 고름의 위치 등에 차이가 있다. 또한 깃 뒤의 머리가 닿는 부분에는 더러움을 방지하기 위하여 흰색의 천이나 한지를 덧댄것이 특징이다. <출처:대구박물관>

양장과 한복
1900년 초에 서양식의 옷이 공인된 이후, 1930~40년대에는 한복과 양장이 혼용되는 가운데 여성의 복식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0년대 전후에 길이가 짧고 좁았던 저고리는 소매에 곡선이 생기고, 길이와 품도 넉넉해졌다. 치마의 길이도 짧아지고 겹겹이 입던 속옷도 겉옷의 변화에 따라 속바지와 치마로 간단해졌다. 남성 한복의 경우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없었지만, 두루마기와 서양식 중절모자를 함께 착용하는 것이 통상적인 예복이 되었다. 또, 양장의 영향을 포켓주머니.단추.서양식의 조끼가 한복에 적용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는 다양한 옷감들이 한복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뉴똥, 모본단, 법단 등의 견직물이 생산되었으며, 1953년에 수입된 나일론을 비롯하여 양단.벨벳.오빠루 등이 크게 유행했다. 1970~80년대의 한복은 레이스와 반짝이 소재, 금박 등으로 표면의 입체감을 통해 장식적인 효과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치마의 형태도 아랫부분이 부풀려진 삼각형 형태였으며, 특히 저고리와 치마를 같은색으로 하여 전체적으로 늘씬하게 보이도록 하는 배색이 유행하였다. <출처:대구박물관>


남자저고리, 1900년대


마고자, 저고리


저고리.치마, 1940년대


두루마기, 1940년대

처음 맞는 생일
아이가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생일에는 1년동안 어려운 고비를 잘 넘겨 건강함을 축복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잔치를 한다. 돌잔치와 돌잡에 풍속에 관한 전통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기록에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16~17세기 전후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첫돌을 맞이한 남자아이에게는 저고리에 풍차바지, 여자 아이에게 치마를 입힌다. 풍차바지는 밑이 트여 있어 활동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졌다. 그 다음에 가장 화려한 색상으로 된 두루마기이다. 다섯가지의 색을 사용한 오방색 두루마기 혹은 까치두루마기라고 한다. 남자아이의 경우 어른에 관목과 두건을 착용한다. 여자아이는 조바위를 착용하는데 공통적으로 아이의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무늬를 수놓았다. <출처:대구박물관>


까치두루마기, 1900년대


어린이 두루마기


전복(20세기 전반)


돌띠(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굴레(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 누비타래버선(1960년대)


후수, 조선 19세기, 문무백관의 조복과 제복 뒤에 늘이는 장식이다. 후수는 품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시 중의 하나로 품계에 따라 색실의 수, 무늬, 환 등의 재료가 다르게 쓰인다.


혼례, 부부의 인연
혼례는 관혼상제의 사례 중 가장 경사스럽게 여겨진 의례이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혼례에는 일반 서민들의 궁중예복 착용이 허용되었다. 형편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신랑은 관리의 복식인 단령에 사모와 각대, 목화를 갖췄고, 신부는 치마.저고리 위에 원삼이나 활옷을 입고 수식을 꾸몄다. 활옷은 홍색비단에 청색으로 안감을 대서 만드는데, 이는 음과 양의 조화, 즉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뜻한다. 바탕에는 장수와 복을 상징하는 다양한 형태의 길상무늬를 수놓았다. 소매 끝에는 한삼을 달며 머리에는 용잠, 치로화관을 머리에 쓴다. <출처:대구박물관>


화관, 20세기 전반


활옷

규중칠우.
오래전부터 여자들에게는 손끝을 떠나지 않는 일곱 동무가 있었다. "자를 척부인이라 하고, 가위를 교두각시라 하고, 인두를 인화부인이라 하고, 다리미를 울낭자라 하고, 실로 청홍흑백각시라 하며, 골무를 감토할미라 하니.<규중칠우 쟁론기>". 규중이란 부녀자가 거처하는 공간이며, 칠우는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곳에 항상 따라 다녔던 바느질 도구이다. 남성들의 문방사우에 대비되는 일곱가지 바느질 도구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바느질이 얼마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일이었는지 보여준다. 옷감을 마름질하고, 바느질 하고, 수를 놓는 일은 단순한 듯 보이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야만 터득되는 일이다. 단순히 옷을 만드는 공간을 넘어서 옛 여성들의 삶과 우리의 옷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곳,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이어져 온 공간이 바로 규방이다. <출처:대구박물관>


버선본 주머니, 가위, 골무, 나무 반짇고리(19세기), 다리미, 인두


베겟모, 조선 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

머리꾸밈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 머리장신구의 발달은 머리의 형태와 가체풍습과 그 시기를 같이한다. 길고 풍성한 머리채는 여성스러운 아름다움과 함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카락만으로는 볼륨있는 머리를 만들기 어려웠기때문에 가체를 사용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교환했던 예물목록에는 두발의 길이와 양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조선시대 이전부터 머리치장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가체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조신시대 머리장신구의 발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가체금지령이다.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무거워져 사치의 원인이 되는 가체 풍속을 없애고자 영조, 정조 때에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 결과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얹은머리 대신 쪽 진 머리가 일반되 되었으며, 다양한 재료의 비녀와 뒤꽂이가 유행했다. 궁중에서도 예장시 큰머리를 얹는 가체대신 목제 가발인 떠구지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점차 화관과 족두리를 착용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 왕비를 비롯하여 내외명부가 머리를 치장할 때 사용하던 장신구인 첩지는 이러한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출처:대구박물관>


떠구지, 조선 19세기, 조선시대 궁중에서 비빈들이 큰 머리를 틀 때, 머리위에 얹는 나무로 된 머리틀이다. 나무 표면은 머리결처럼 조각하고 검은 칠을 했다. 아랫부분에 비녀를 꽂을 수 있는 2개의 구멍이 있다.


첩지, 조선, 조선시대 왕비를 비롯한 내외명부가 머리를 치장하는 장신구이다. 왕비는 도금한 용첩지를 쓰고, 내외명부는 개구리 형태의 첩지를 썼다.


장잠(조선초기), 빗치개(19세기), 뒤꽂이(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


떨잠(19세기), 비녀(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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