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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박물관]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활약과 명의 참전

younghwan 2013. 8. 1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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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많은 요인들로는 크게 수군의 활약, 명나라의 참전, 의병의 활약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임진왜란 극복에 가장 큰 역할을 했으며,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전략적 승리를 든다면 이순신 장군을 필두로 한 수군의 활약일 것이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이래로 파죽지세로 조선관군을 격파하고 한양과 평양성을 점령한 후 명나라 국경 근처까지 진출을 했지만, 길어진 보급선을 타파하고 호남의 곡창지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수군이 서남해안 연안항로를 장악해야 했지만,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수군의 전력은 생각보다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부산 수영에 주둔했던 경상우수영은 쉽게 왜군에 점령되었지만, 거제도의 경상우수영과 여수의 전라좌수영은 초반에 왜군과 접전을 벌이지 않고 기다리면서 서남해 연안항로를 적극적으로 장악하였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왜군은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도했지만 한산도 앞바다에 크게 패전한 이후 정유재란 때 원균의 수군을 격파하기까지 오랜 기간동안 연안항로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에서 왜군이 해전에서 승리를 하지 못했던 것은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수군이 전략적으로 잘 대응했기도 했지만 함선의 규모나 화포, 운영능력에서 왜군에 비해서 조선수군이 우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의 주력함대인 판옥선과 신무기인 거북선, 함선에 장착된 다양한 화포들이 왜군에 비해 크게 우수했으며, 이런 연유로 조선수군이 붕괴된 이후 12척의 판옥선으로 100여척의 왜군을 격파한 명랑해전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수군은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했던 고려말.조선초 이후 적극적으로 전력을 개선해 왔으며, 임진왜란 직전 삼포왜란, 을묘왜란 등 여러차례 왜의 반란이 있었기때문에 적극적으로 왜구의 출몰에 대비해 왔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임진왜란에서 수군이 우세를 가져갈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충무공전서, 1795년, 복제품, 정조의 명으로 이순신이 남긴 글을 집대성한 전집이다. 특히 거북선의 그림은 그 재원과 모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조라포남봉관해도, 1586~1587년, 관원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으로 장소는 조라포(현재 거제시 구조라)에 위치한 조선시대 수군의 기지 부근에 있는 남봉이다. 화변 맨 위에 예서체로 '조라포남봉관해지도'라고 적었고, 하단에는 이날 모임에 참석한 관리들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해 전 남해안 수군의 기지상황과 임진왜란 때 활동한 인물들의 이력을 알려주는 기록화이다. <출처:진주박물관>


각선도본, 복제품, 전선.전선철상장.조선.북조선  등 여섯장의 채색화로 되어 있다. 돛대-닻-노-키 등 판옥선의 구조를 상세하게 보여주는 등 조선후기 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용이나 귀신의 그림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이순신의병차정첩자, 1597년, 복제품, 정유재란 떄 홍양(전남 고흥)에서 의병을 일으킨 신군안이 수군통제사 이순신으로부터 의병장 선정의 증서를 받은 것이다. 신군안은 그 뒤로 연해지역 7읍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계속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 뒤 1598년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때 수군전력 증강에 연해지역 의병운동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해 준 자료이다. <출처:진주박물관>


통영도, 정유재란 이후, 전라도의 고금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은 지나치게 서쪽에 치우쳐 있어 해안 방위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해 1604년 경상도의 한적한 어촌이었던 두룡포 장구항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 지명조차 '통영'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 지도에는 장구항을 중심으로 현존하는 세병관, 충열사를 비롯한 통제영의 여러 관청건물, 항구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임란첩보서복, 보물 660호, 1598년 정유재란때 흥양현감 최희량이 삼도수군통제사와 전라감사에게 올린 보고서이다. 1598년 3월부터 9월사이 흥양(전남 고흥) 관내 안산 등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한 일과 삼도수군통제영이 제조한 전선과 무기, 군량 등을 보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이 보고에 대해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이 친필로 보고를 받았다는 새김과 수결이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수군징집명령서, 복제품, 무자년 4월, 수군영의 박춘성을 통인의 역할을 맡기는 문서이다. 통인은 관아에 속하여 잔심부름을 하던 하급관리를 말한다. <출처:진주박물관>


거북선, 거북선은 판옥선의 상장 갑판을 떼어내고 둥근 판자를 덮어 배 앞부분에 용의 머리를 달았다. 임진왜란 당시에 활약한 거북선은 3척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두 임진왜란 직전에 건조되었다고 한다. 크기는 판옥선과 비슷하여 승선인원 125명, 35.3m, 너비 10.6 m, 높이 6.6m였다. 개판 위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칼.송곳을 꽂아 놓았고, 용의 입에서는 대포나 유황불을 뿜을 수 있게 했다. 거북선의 전후좌우에는 천.지.현.황의 총통을 장착하여 강력한 화력을 발휘하였다. 거북선은 판옥선과 달리 노젓는 격군과 전투요원을 모두 개판 밑에 배치함으로써 적으로부터 보호된 상태에서 전투수행을 할 수 있게 고안되었다. 그 결과 거북선은 적의 함대 깊숙한 곳에서도 전투를 할 수 있었다. <출처:진주박물관>


판옥선, 조선 명종 때 개발되어 임진왜란 중에 크게 활약한 전투선으로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전투함이다. 판옥선은 개발된 지 37년 만에 닥쳐온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임진왜란의 여러 해전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판옥선이 아주 크고 단단하기 때문인데, 임진왜란 때에 이미 125명 이상의 군사를 수용하여 그 규모와 강도는 일본 군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판옥선은 누각을 높게 설치하고 갑판 위아래에 각각 노를 젓는 격군과 전투를 맡은 군사를 따로 배치하여 서로 임무를 수행하는 데 편리하도록 설계하였다. 또한 적이 배 위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하고 포를 높게 설치하여 유리한 자리에서 적에게 포격을 가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출처:진주박물관>

 임진왜란에서 수군의 활약으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호남 곡창지대를 보전한 것의 임란극복에 큰 역할을 했으며, 명나라의 참전 또한 조기에 일본군의 기세를 꺾고 평양성과 한양을 탈환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의 동기가 자국 바깥에서 전쟁을 치러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는 하지만,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후대에 명나라와 조선군 사이에는 사이가 좋지 않고 명나라군이 거만했다는 평가가 많기는 하지만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부터 일부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로 임진왜란 참전으로 명나라가 많은 비용을 지출하여 국력이 약해진 점이 청나라에 멸망한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지며, 명나라 멸망 이후 임진왜란에 참전한 진린의 후손을 비롯하여 많은 인사들이 조선에 망명했던 점도 당시에는 명나라와 조선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외세의 힘으로 해방을 많은 한국이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을 치러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처럼 외세에 의해 국난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국가 권위의 실추되고 자주적인 면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명군의 참전과 공과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의 대대적인 침입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였기 때문에 명나라는 조선이 단기간 내 일본군에게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자, 일본과의 동맹을 의심하여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관리를 파견하기도 했다. 명조성은 조선의 파병요청에 대해 논란 끝에 중국영토 밖에서 왜적을 물리친다는 원칙 아래 원군을 파병하였다. 조선은 명군의 지원으로 몇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평양과 서울 등을 탈환하고 대부분의 국토를 단기간 내 수복할 수 있었다. 둘째, 조선의 배후에는 명나라가 후원하고 있다는 점을 일본에게 명확히 인식시켰다. 셋째, 전쟁기간 중의 파농과 기근으로 부족해진 식량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명군의 지원은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도 있다. 첫째, 명군의 지휘권 행사로 조선군은 의지대로 독자적인 전투를 벌일 수 없었다. 둘째, 명군의 일방적 강화협상 추진으로 조선은 자주적 국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셋째, 명군의 접대과정에서 국왕의 권위가 심각하게 실추되었다. 다섯째,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성향이 한층 강화되었다.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당한 조선이 명의 파병을 이끌어 낸 것은 외교적인 큰 성과였다. 그러나 자국의 영토 밖에서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명의 입장에서 볼 때 희생을 감수하면서 조선을 위해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출처:진주박물관>




임진명장첩,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참전했던 이여송과 여러 장수, 참모 등의 글씨를 엮은 서첩이다. 이민서, 김만기 등의 발문이 있다.


사암일기, 임진왜란때 참전했던 명군 장군의 문집이다. 그는 명나라 군사로서 조선에 원군으로 왔다가 귀화하였으며 본관은 영양이다.


평양성 탈환도, 1592년 6월 14일 북상한 일본군에게 평양성을 빼앗겼다. 이를 조.명연합군이 7월 15일 공략하였으나 실패하고 이듬해인 1593년 1월 2일부터 다시 공격하여 6일 탈환하였다. 이 병풍은 평양성 탈환에 성공한 2차 전투를 그린 민화풍의 그림이다. 조선후기 사대사상에 의거하여 명군의 활약상을 담고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권응수 표, 1598년 울산성 전투에서의 공로를 치하하여 명의 도독부에서 경상좌도방어사 권응수에게 준 일종의 감사장이다.


정명열 유지, 정명열은 평안도 안주에서 중국사신을 접대하는 영위사로 임명하니 전라도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치하여 사신접대를 행하라는 유지이다.


세전서화첩, 복제품, 풍산김씨 미동파 김중휴가 조상의 행적과 관련된 자료들을 대본으로 하여 모두 19명의 조상에 얽힌 31가지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묶어 만들었다. 이중 천조장사전별도는 임란에 참전한 명나라 군사가 철군하는 모습이다.


변무주, 이전구, 월사 이정구의 문집인 '월사집'에서 1598년 명나라에 전한 글인 '변무주'만 뽑아 만든 책이다. 병부주사를 맡던 명나라 관리가 조선이 일부러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범하려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고 황제에게 무고하게 보고한 일이 있었다. '변무주'란 이에 대해 '전후 사정을 소상히 해명한 글'이라는 뜻이다. <출처: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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