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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박물관] 임진왜란 전쟁의 기록과 기억

younghwan 2013. 8. 14.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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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참전으로 왜군이 부산지역으로 퇴각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강화회담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되고 왜군은 다시 한번 대공세를 펼치며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정유재란 초기 왜군은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을 칠전량에서 궤멸시키고 육상으로는 진주성과 남원성 싸움에 승리한 후 호남지역으로 진격하였다. 전세는 왜군이 직산현 전투에서 패배하고 수군 또한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배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 이후 전장은 부산,울산,사천지역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으며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왜군이 퇴각하면서 임진왜란은 끝나게 된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조선,왜,명나라가 참전했던 세계대전 성격의 전쟁이었으며, 명나라는 전쟁에 소요된 많은 비용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일본 또한 많은 군사들이 한반도로 출병하면서 경제적.군사적으로 많은 출혈이 있었는데, 특히 전쟁에 참전하고 그 비용을 조달해야 했던 한반도와 가까운 교토 서쪽 지방과 큐슈지방 군벌들이 큰 피해를 입었던 반면 동북지방 군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아 큰 손실을 입지 않았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주도세력으로 다시 부상하면서 일본을 재통일하고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다. 조선은 직접적인 전쟁의 당사자로 많은 국민들이 전쟁으로 사망하였으며, 사회적인 인프라나 제도 등이 무너지는 등 가장 극심한 손실을 입었다. 임진왜란 이후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으며 명의 참전에 따른 사대주의가 크게 부상하여 국가나 사회의 실질적인 이익이나 안전을 위협하고 국론이 분열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동아시아 삼국은 적극적인 대외교류를 지양하면서 쇄국적인 성향으로 흘렀으며, 이는 세계화되어 가던 당시의 국제질서에 반하는 독자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18~19세기 서양세력에 굴복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유재란과 종전
1596년(선조29) 9월 명과의 강화 회담이 결렬되자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이듬에 1월14일 14만 4천여 명의 일본군이 재침공하였다. 일본군은 호남과 충청도를 통해 동시에 서울로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수군은 7월 칠전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괴멸시켰다. 육상에서도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진격하였다. 조명연합군은 직산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고, 해전에서는 재기용된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들은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이 본거지로 삼고 있는 울산, 사천, 순천을 동시에 공격하여 일본군을 압박하였다. 1598년 8월 도요토미가 사망하지 일본군의 퇴각명령이 내려졌다. 이때 이순신은 노량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로써 7년간의 임진왜란은 끝나게 되었다. <출처:진주박물관>


매창집, 조완벽전은 정사신의 문칩인 '매창집'에 실려 있다. 조완벽은 진주 출신으로 정유재란 당시 붙잡혀 일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다니며 무역을 하며 큰 부자가 되었다. 10년 만에 돌아와 가족과 상봉하고 안락한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출처:진주박물관>


상촌유고, 1621년, 신흠의 문집으로 1621년에 신흠 자신이 쓴 서문이 붙어 있는 필사본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인물.사례 등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사람인 신흠이 쓴 시, 주문, 비문 등을 연대순에 따라 전집, 후집, 속집, 별집, 내외집, 여집 등으로 구분하였다. <출처:진주박물관>


해동삼강록, 1808년,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충.효.열로 이름난 인물을 행적과 전설을 수록한 책이다. 권2는 시립.김시민.이순신.원균.이계종.김천일 등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병자호란 때 순절한 충신 336인이 수록되었다. <출처:진주박물관>


금계집, 노인(1566~1622)의 문집이다.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진산저투.의령전투 등에서 여러 차례 공훈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남원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뒷날 복수의 계책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의 산천형세, 호구, 풍속 등을 상세하게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그 뒤 탈출하여 명나라로 건너가 무이서원에서 경학을 강론하다 귀국하였다. 권6 이른바 일본풍속기로 저자가 일본의 지형과 병세를 탐지해 복수의 바탕으로 삼고자 기록했다는 글이다. <출처:진주박물관>


재조번방지, 17세기, 신경이 1577년(선조10)부터 1607년까지의 임진왜란 전후 30년 동안에 걸쳐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와 조선이 명나라의 후원으로 제조.재건된 사실을 적은 책이다. 서문은 없고, 앞에 인용한 서문은 없고, 앞에 인용한 서목 32종이 적혀 있으며, 이어 적당한 분량으로 분권되어 있다. 저자의 저술태도는 자신의 견해를 근거없이 첨부하지 않고 다른 기록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며, 내용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때의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를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사명대사글씨, 복제품, 사명대사의 친필이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시 의승병을 이끌고 활약하였으며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코영수증, 1597년 일본, 복제품, 1597년 10월1일 발행되었다. 나베시마 가츠시계 군이 전라도 금구, 김제 지방에서 절취한 조선인의 코 3,369개를 바치고 받은 수취장이다. 도요토미의 측근인 군봉행 3인이 코를 받았음을 증명하는 수취장(영수증)을 써주고 코는 술통에 넣어 일본으로 보내 도요토미가 실제 검사하도록 하였다. <출처:진주박물관>


도요토미 임종시, 1598년, 복제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년 8월 후시미성에서 사망했다. 죽기 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지은 시로 松은 그의 아호이다. 내용은 "이슬과 함께 내리고 이슬과 함께 사라지는 내 몸인가. 오사카의 일도 꿈속의 또 꿈이런가."이다. <출처:진주박물관>


두부제조그림, 복제품, 일본의 전통 두부를 만드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두부제조법은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두부는 원래 중국 한나라 때에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중국과 교류가 가장 빈번하였던 원나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임진왜란 때 이 기술이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출처:진주박물관>


조선물어, 1849년, 복제품, 정유재란에 참전하 오카와우치 히데모토의 종군일지를 모은 것으로 다른 이름은 진중일기이다. 1597년 조선정벌대장군 임명에서 시작해 전말에 이르러 도요토미의 죽음과 1599년 도요쿠니신사를 건립하는데서 끝나고 있다. 울산성 전투와 남원성 전투 등 조선각지의 전황이 일기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군산이우도, 복제품, 조영은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생질로서 임진왜란 때 군산도로 피난하였다. 이 작품은 그와 김주가 군산도에서 서로 만나 그 우정을 기리기 위하여, 1593년 봄에 조영이 그림을 그리고 김주가 서문을 써서 완성한 것이다. 당시 조영은 22세, 김주는 30세였다. 피난 중이라 당시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고아한 품격과 선비의 기풍을 유지하고자 했던 노력이 담겨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선씨상서, 보성군에 사는 유학 선기방.선기갑.선시각 등이 전라도 순찰사에게 올린 상서문이다. 자신의 선조 가운데 임진왜란 때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된 선어강과 그 아들 해주.인수.종제 등은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왜장의 무기를 탈취하고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은 공이 있으므로 일가의 6공신에 대하여 포향하여 줄 것을 청원하는 문서이다. <출처:진주박물관>


형제급난도, 복제품, 임진왜란 때 백화산 싸움터에서 이전이 갖은 위험과 고난을 겪어가며 병으로 사경에 이른 동생 준을 업고 싸움터를 빠져나와 함께 생명을 구한 형제간의 우애를 그린 그림이다. 피신 중에 적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적이 이 형제를 보고서 칼을 빼어 죽이려고 하였으나, 곧 그들의 사정을 알고는 우애에 감동하여 살려주었다고 한다. 이준이 찬하였으며 책의 뒷부분에 이 사실을 입증해 주는 여러 명사들의 찬양하는 글이 실려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복제품, 1617년(광해군9) 왕명에 의하여 홍문관부제학 이성 등이 편찬한 책으로 18권 18책으로 이루어진 목판본이다.임진왜란 이후에 정표를 받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상.중.하 3편으로 편찬하였으며, 임진왜란 발발 이래의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실을 수록.반포하여 민심을 격려하느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새로운 동아시아 세계의 전개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난 뒤 참전국은 각각 전후 수습이 큰 과제였다. 조선은 직접 전쟁터가 되었던 까닭에 피해가 가장 극심하였다. 경제력의 회복과 아울러 실추된 국가권위의 정립과 사회질서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한편, 전쟁 중 직접 국내외 실상을 체험한 광해군은 새로 일어난 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실리외교를 폈는데 이는 명에 대한 명분과 사대주의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국내정치에 큰 논란과 대립을 일으켰고, 마침내는 인조반정으로 임금과 집권당파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침략당사인 일본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문제로 양대 세력이 대립하더니 세키가하라전투(1600)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았다. 일본 역시 전쟁으로 경제적 파탄이 심했으나 조선에서 약탈한 귀중품과 포로로 데려간 사기장 등의 각종 기술자, 인쇄술 등의 선진기술, 학자와 서적 등을 수용하여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경제적 이득과 문화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은 만주에서 새로 일어난 청이 쇄약해진 명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명은 임진왜란 중의 파병을 빌미로 막대한 양의 은과 군대의 파견, 명군의 주둔지 마련을 요구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전쟁에 참여했던 동아시아 삼국은 국내적으로 정치적 변화를 겪었고 대외적으로는 쇄국을 견지하여 활발한 해외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삼국은 세계질서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출처:진주박물관>


초량왜관도, 변박, 복제품. 1678년 부산 도모포에 있던 왜관을 초량으로 옮겨 지은 왜관 주변의 그림이다. 왜관은 조선시대에 일본인이 통상을 하던 무역처, 숙박처, 접대처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건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신은 한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부산에서 외교와 통상을 다루었다. 그림 속에 돌담 안쪽이 왜관, 그 북쪽 건물은 일본 사신을 접대하던 연향대청이다. <출처:진주박물관>


한음집, 1673년, 조선 중기의 문신 이덕형의 시문집으로서 12권 5책의 목판본이다. 그의 손자 이상정이 편찬하여 1673년(현종14)에 간행하였다. 문집의 내용 대부분이 임진왜란과 관련된 것이 많다. 특히 임진왜란 때의 국내 실정이나 전쟁상황, 그리고 조선과 명,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교린지, 1802년(순조2) 김진서가 그의 동료인 이은효, 임서무 등과 함께 편찬한 책으로 여러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수록되어 있다. 일본과의 교린정책과 외교사를 적은 책이다. 1720년(숙종46) 편찬된 '통문관지'의 '교린'조를 증보하여 만든 것이다. <출처:진주박물관>


외교문서, 1611년 예조에서 대마도주에게 보낸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 국가간의 실무교류가 재개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는 문서이다.


아메노모리호슈 초상, 복제품, 아메노모리 호수는 쓰시마 번과 왜관을 왕래하며 조선과의 실무교섭을 담당했던 일본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조선과 교섭할 때의 기본자세에 대해 세세히 기술하면서 양국의 풍습과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국을 속이거나 다투지 않는 성신으로써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출처:진주박물관>


대마국도, 1811년, 복제품, 18811년(순조11)에 통신사가 대마도를 거쳐 간 것을 그린 것이다. 육상의 이동경로와 건물지는 간략하게 그려져 있으나 해상의 이동경로는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선무사편액, 명나라 병부상서 형개와 도리사 양호를 제사 지내는 사당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선무사는 서울 도성 남문 태평관 서쪽에 있었다. 1598년(선조31)에 창건하여 형재를 제사 지냈고, 1604년(선조37)에 양호를 배향하였다. 이 두사름을 모신것은 임진왜란 때, 원군을 거느리고 와서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출처:진주박물관>


화양지, 1744년, 송주상이 편찬한 화양서원의 기록이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식을 강조하였던 조선 후기의 상황을 보여준다. 또한 송시열에 관한 기록도 있는데 양반사회와 곡의 설치.운영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출처:진주박물관>


일제강점기와 임진왜란. 임진왜란 의병정신을 계승하였던 근대의병운동이 가혹한 탄압 속에서 실패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뜻있는 사람들은 민족의 역사를 일깨워 독립정신을 고취하려 했다. 특히 임진왜란은 일본의 침략을 극복한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당시 활약한 선조들의 행적을 발굴하고 위인전으로 발간하여 보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1908년부터 <대한매일신보>에 임진왜란 최고 위인의 전기인 <이순신전>을 연재한 것은 이런 움직임의 시발점이었다. <출처:진주박물관>


일본교과서 속의 임진왜란. 일본 중등 사회 과정의 역사부분 교과서는 모두 8종이다. 이 교과서들은 대개 임진왜란을 하나의 작은 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교과서에서는 임진왜란을 '조선침략'이라는 제목 아래 도요토미의 대륙정복야망과 조선 침략의 과정, 조선 백성들의 저항, 이순신의 활약, 도자기술의 일본유입 등을 언급하고 있다. 다만 가장 우익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후쇼사에서 출판한 교과서는 '조선으로의 출병'이라는 항목으로 서술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출처:진주박물관>


세계 학계의 임진왜란 연구. 16세기의 유럽은 신항로 개척을 바탕으로 동서 무역과 식민지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를 대항해시대라 하는데 이때부터 각 대륙은 오늘날과 같은 '하나의 지구'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실제 동서교류사 서술은 유럽사를 중심으로 하고 비유럽권은 등한시 하였다. 최근에는 이에서 점차 벗어나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다만 일찍이 세계학계와 교류하였던 일본의 연구물과 자료들이 다수 인용되고 있어 자칫 그 논리와 시각이 반영될 위험성이 높다. 새뮤얼 홀리의 <THE IMJIN WAR>(2005년)는 이를 탈피하여 한국 학계의 연구성과를 반영하고 자료를 이용하여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주목 된다. <출처: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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