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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파주 삼릉(사적205호), 한명회의 두딸인 장순왕후 공릉, 공혜왕후 순릉과 영조 장남 진종의 영릉이 모여 있는 곳

younghwan 2014. 1. 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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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에 위치한 파주삼릉은 조선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의 무덤인 공릉, 성정의 원비인 공혜왕후의 순릉과 영조의 장남인 추존왕 진종(효장세자) 부부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초기 세조반정의 공신인 한명회가 세자빈으로 들였던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가 세자빈시절에 죽으면서 세자빈 무덤을 만들면서 조성되었으며, 한명회의 딸로 성종의 원비가 된 공혜왕후가 죽으면서 부근에 왕비의 무덤이 조성되었다. 세조와 함께 단종을 몰아내고 권세에 올랐던 한명회가 두딸이 세자빈과 왕비가 되었으나 이른나이에 죽자 직접 두딸을 위해 조성한 능역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이다.
 
 파주 삼릉은 다른 왕릉과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서오릉에 세조의 장자 덕종과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영릉,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창릉이 있고 인근에 인수대비의 아들인 월산대군이 있는 등 세조에서 성종대이 이르는 왕실 무덤들이 모여있는데 이는 당시 실권자인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성종의 능인 선릉은 파주에서 멀리 떨어진 강남에 위치하고 있다.

파주삼릉, 사적 205호
이곳은 조선의 제8대 임금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한씨를 모신 공릉과 제9대 임금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한씨를 모신 순릉, 그리고 제22대 임금 정조의 양아버지 진종과 효순왕후 조씨를 모신 영릉이 있는 곳이다.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로 자매사이이다. 파주 삼릉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한북정맥의 개명산과 우암산을 조종산으로 하고 명봉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중턱에 봉분을 만들어 좌우의 지형이 청룡과 백호의 산세를 이루고 멀리 안산을 바라보도록 배치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파주삼릉 입구


파주 삼릉 들어가는 길


파주삼릉 공간배치.


장순왕후 공릉, 장순왕후(1445~1561)는 조선 제8대 왕인 예종의 왕비로, 조선 전기 막강한 권세를 떨쳤던 한명회의 딸이다. 1460년(세조6) 세자빈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인성대군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17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장순왕후는 돌아가신 후 장순빈으로 불렸으며, 1462년 2월 파주에 모셔졌다. 장순왕후는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돌아가셨으므로 왕후의 능이 아닌 세자빈의 묘로 조성하였다. 따라서 공릉은 봉분 주위에 두르는 병풍석과 난간석, 무덤을 호위하는 무석인을 생략하여 간소하게 배치하였다. 1472년(성종3) 세자빈에서 왕후로 추존되었으며, 이후 무덤의 이름도 왕후격으로 높여 공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공릉 비각 안에 있는 표석은 공혜왕후 순릉의 표석과 함께 1871년(순조17)에 세운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공혜왕후 순릉, 공혜왕후(1456~1474)는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의 첫번째 왕비로, 한명회의 딸이며 예종의 왕비인 장순왕후와는 자매 사이이다. 공혜왕후는 12세에 잘산군(훗날의 성종)과 혼인하였으며, 1469년 잘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가 되었다. 1474년(성종5) 1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같은 해 6월에 장순왕후가 안장된 공릉의 왼쪽 언덕에 모셔졌다. 시호는 공혜이며 능 이름은 순릉이다. 공혜왕후의 순릉은 파주삼릉 중에서도 유일하게 조성 당시부터 왕릉으로 만들어졌다. 봉분 주위에는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각각 두 쌍의 석호와 석양이 왕비를 호위하는 듯 봉분을 등지고 바깥쪽을 향해 있다. 봉분 앞 중앙에는 혼유석과 장명등, 그리고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진종.효순왕후 영릉. 진종(1719~1728)은 영조의 맏아들이자 사도세자(추존 장조)의 이복형이다. 1725년(영조1)에 왕세자가 되지만 1728년 10세의 어린 나이로 돌아가셨다. 이후 효장이라는 시호를 받아 효장세자로 불리었다. 효순왕후(1715~1751)는 1727년(영조3) 세자빈이 되었다. 1751년에 돌아가신 후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진종의 옆자리에 모셔졌으며, 효순이라는 시호를 받아 효순현빈으로 불리게 되었다.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은 돌아가신 후 두 차례에 걸쳐 추존되었다. 영조는 1762년(영조38) 사도세자를 폐위한 후, 1764년 당시 세손인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에 따라 효장세자와 효순현빈은 정조가 왕이된 후에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되었으며, 무덤의 이름도 왕릉으로 높여 영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1908년에는 대한제국 황제인 순종에 의해 황제와 황후로 다시 한 번 추존되었다. 이러한 추존 과정은 영릉에 있는 3기의 표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공릉으로 들어가는 숲속길


영릉으로 들어가는 숲속길


파주삼릉 재실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비교적 큰 규모의 행랑채. 가운데 솟을대문이 있다.


행랑채.


재실은 앞면 6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


행랑채. 관리인들이 주로 머무는 공간으로 보인다.


파주삼릉 역사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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