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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국보7호), 교통의 요지에 세워졌던 절터의 흔적

younghwan 2014. 6. 27.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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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시 성환읍 대흥리 1번국도 도로변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비석인 봉선홍경사 갈기비(국보7호)이다. 비석이 세워진 곳은 서울과 호남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던 봉선홍경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절터이다. 봉선홍경사는 고려 초인 1021년(현정12)에 세워진 사찰이다. 당시 이지역은 교통의 요지이지만 마을이 없고 주변에 습지가 많아 도적이 자주 출몰했기때문에 여행객의 안전을 위하여 현종이 절과 숙소인 원(院)을 세웠다고 한다.

봉선홍경사 갈비는 사찰이 세워진 뒤 5년후에 세워졌다. . 갈비(碣碑)는 보통 석비보다 규모가 작고 간략화된 것을 말하지만, 이 비석은 머릿돌, 몸돌, 거북받침돌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석비의 형식을 하고 있다. 거북받침돌의 머리는 어룡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다. 머리에는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생긴 날개를 새겨 생동감을 조구 있다. 비석에는 사찰을 세운 내력이 적혀 있다. 글은 당대 학자로 해동공자로 불렸던 최충이 지었고 백현례가 썼다고 한다. 고려초에 만든 비석이지만, 글자가 또렷히 남아 있어 지금도 읽어 볼 수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이 새겨져 있다.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국보7호, 천안시 성환읍 대흥리
1021년(고려 현종12)에 봉선홍경사라는 사찰을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026년(고려 현종17)에 세운 비이다. 이곳은 호남과 한양을 잇는 갈래 길로 교통의 요지였으나, 갈대가 무성한 못이 있고, 사람이 사는 곳과 떨어져 있어 강도가 자주 출몰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어려웠다. 이에 현종이 불법을 펴고 갈가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선홍경사라는 사찰을과 광연통화원이라는 숙소를 세우도록 한 것이다. 사찰의 이름 앞에 봉선이라 붙인 것은 현종의 부왕 안종의 뜻을 받들어 지었기 때문이다. 최충이 비문을 지었고, 백현례가 썼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인 귀부와 이무기를 조각한 덮개돌인 이수를 갖추고 있다. 귀부는 지대석과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어룡의 머리가 정면을 보지 않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고려시대 조각과 금석문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천안시청>


경기도와 충청남도의 경계가 되는 안성천 남쪽 1번국도변에 위치한 봉선홍경사 갈기비(국보7호). 이곳은 고려시대 주요 교통로를 오가는 여행객들의 편의를 위해 세웠던 사찰과 숙소(阮)가 있었던 곳이다.


비석은 고려초에 세운 것으로 거북받침돌, 몸돌, 머릿돌을 제대로 갖추고 있으며, 조각수법도 뛰어난 편이다.


거북받침돌과 지대석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생동감이 넘치는 조각수법이다.


거북받침돌 머리는 물고기 지느러미 모양을 하고 있는 날개를 달고 있는 어룡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거북받침돌


옆쪽에서 본 거북받침돌


뒷쪽에서 본 거북받침돌


비석에는 사찰을 세운 내력을 적고 있다고 한다. 고려초에 세워졌지만 해서체로 쓴 글자가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고려초 해동공자로 불렸던 최충이 글을 짓고  백현례가 썼다.


머릿돌에는 용이 구름 사이로 날아 오르는 모습을 새겨 놓고 있다. 그 아래에 '봉선홍경사갈기'라 적힌 비석의 이름을 볼 수있다.


비석 옆에는 이곳에 절터였음을 말해주는 작은 석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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