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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박물관, 화성축성의 역사와 문화를 볼 수 있는 박물관

younghwan 2014. 10. 16.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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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박물관은 수원화성 축성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는 전문박물관이다. 수원화성이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수원화성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2009년에 개관하였다. 박물관은 크게 '화성축성실'과 '화성문화실'로 구성되어 있다. 화성축성실은 정조가 당대의 과학기술과 역량을 총동원하여 화성을 건설하는 모습과 자급자족이 가능한 계획도시로 발전하는 수원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화성문화실'은 정자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을 방문하여 백성과 하나되는 모습, 화성 축성을 이끈 채제공의 삶, 화성 방어체제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수원화성은 한국을 대표하는 읍성으로 18세기말 당대의 건축기술과 역량을 총동원하여 건설하였다. 석축성으로 쌓은 기존의 읍성과는 달리 석축성과 중국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벽돌로 쌓은 전성이 고루 섞여 있다. 한국의 읍성에서 볼 수 있는 포루, 돈대, 장대와 같은 다양한 방어시설과 화포와 조총이 발달했던 당시의 환경이 적절이 반영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그 축성과정이 <화성성역의궤>에 자시히 기록되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부분을 정확한 고증에 의해 복원하여 높은 평가를 받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수원화성박물관 전경. 수원화성 축성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는 전문박물관으로 복원된 화성행궁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 1층 로비


박물관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수원화성 모형


화성축성실, 수원부 읍치를 이전하면서 정조는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꿈이 깃든 도시를 건설하고자 화성을 축성하였다. 조선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바탕에 둔 정조가 과학기술을 총동원하여 화성을 건설하는 모습, 그리고 자급자족의 계획도시로 발전하는 수원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황금갑옷을 입은 정조, 정조는 조선시대 국왕 중에서 가장 많은 행차를 한 분이었다. 백성들과의 직접 만남을 통해 사회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의도와 장엄한 행차를 통해 국왕의 위엄성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정조의 행차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1795년 윤2월의 화성 행차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 화성 행차는 약 6,000여 명이 동원된 대규모 행사였다. 이 행차에 정조는 강력한 왕권의 상징적 표현으로 '황금갑옷'을 입고 화성에 입성하였다. 이는 화성의 완공(1796)을 앞두고 왕조의 중흥과 그 권위를 통하여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계몽군조로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어 왕권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자 함이었다.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기 '둑纛'과 용이 그려진 대형 깃발 '용기龍旗' 역시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정조가 그린 그림과 저서


정조의 글을 모은 문집인 홍재전서


수원부 주변.


화성축성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수원화성 축성과정을 보여주는 모형.


화성행궁을 그린 그림


화성행궁 모형


수원부와 관련된 각종 문서들


시전 모형. 신도시 화성에 화성축성과 함께 길을 새로이 정비하여 중앙에는 교차로인 '십자로'가 생성되었다. 독점 상인인 시전은 십자로 주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여 수도권 상업 유통의 중심을 이루었다.


화성문화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을 방문하여 백성과 하나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화성 축성을 이끈 채제공의 삶과 화성 방어체계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문화실 내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월을 방문했던 을묘원행을 그린 그림을 볼 수 있다.


황룡기, 국왕을 상징하고 행렬의 앞쪽 중앙에 위치하는 깃발이다.


1795년 화성백성들에게 쌀고 소금을 나누어 주는 장면을 그린 신풍루사미도를 재현하고 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그린 그림


잔치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모형


조선시대에 사용한 도검.


채제공 초상화


충무공전서, 정조의 명으로 간행된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이다. 정조대에는 병학지남을 비롯하여 많은 병서들이 저술되었다.


화성의 무기들, 화성에는 조선후기 무기의 발달에 따라 먼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불랑기포와 쇠뇌가 중심이었다.


화포와 총포가 발달한 18세기 무기체제를 반영하여 수원화성에 세워진 방어시설인 공심돈.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 벽돌로 쌓았으며, 내부에 군사들이 총포를 이용하여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2층 로비


용두龍頭, 화성행궁에서 출토된 용두. 건물의 용마루 아래 내림마루에 설치된 용머리 모양의 장식물이다.


취두鷲頭, 화성행궁에서 출토된 취두.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에 설치한 매의 머리 모양의 장식물로, 건물의 위엄과 형태를 풍부하게 한다.


선정비, 수원유수를 지낸 인사들을 위해 세웠던 공덕비들을 박물관 마당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


유형거游衡車, 실학자 정약용이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고안해 사용한 수레이다. 수레바퀴가 너무크고 잘 부러지는 약점과 힘이 많이 드는 썰매의 단점을 보완해 새롭게 만들었다. 특히 저울의 원리를 이용한 반원 모양의 부품인 복토는 수레의 무게 중심을 평형으로 유지시켜 수레가 비탈길에서도 빠르고 가볍게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화성 축성에는 일반 수레 100대가 324일 걸려 운반해야 할 짐을 유형거 70대로 154일만에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어 유형거의 뛰어난 성능을 알 수 있다. <출처:수원시청>


거중기擧重機, 거중기는 정약용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로 오늘날의 기중기와 비슷한 도구이다. 위와 아래에 각각 4개씩의 도르래를 연결한 후 그 끈을 물레에 감아 당기면 무거운 물건도 가볍게 들어 올릴 수 있어 화성 축성에 큰 도움이 되었던 도구이다. <출처:수원시청>


녹로(轆轤), 긴 장대 끝에 도르래를 달고 끈을 얼레에 연결하여 돌을 높이 들어 올리는데 사용하던 도구로, 높이가 11m에 이른다. 화성 축성때 2개를 만들어 높은 성벽을 쌓는데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후의 각종 궁궐 공사에도 활용되었다.


화성행궁 앞 광장


화성행궁 광장 앞 '+'자 대로에 세워진 종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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