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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양산 영축산 통도사 - 적멸보궁, 사리탑

younghwan 2010. 2. 15.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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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 통도사의 상로전 영역의 주불당인 대웅전 뒷편에는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모신 사리탑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웅전 건물의 명칭이 북쪽 방향에서는 적멸보궁이라고 합니다. 통도사의 사리탑이 우리나라 최고의 성지로 여겨지며 그래서 통도사를 불보사찰이라고 불리워지는 까닭입니다. 사리탑에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탑을 돌면서 기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에서 본 쇠똥구리 석상을 도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가운데 석종 형태의 사리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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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을 밝히는 석등, 통도사에는 길목마다 많은 석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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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라 건물이름이 적별보궁으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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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서 바라본 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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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을 지키는 부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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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대웅전 뒷편에 있는 신라시대 석조계단. 국보 제290호. 높이 300cm, 너비 990cm. 646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경주 황룡사탑, 울산 태화사탑과 함께 봉안한 곳으로 매년 초하루와 보름날에 계(戒)를 설했다고 한다. 금강계단이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받은 계법이 금강(金剛)과 같이 단단하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조에 의하면 사리가 도난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금강계단의 석함 안에는 구렁이와 두꺼비가 있다고 했으나 1235년(고종 22) 김이생(金利生)과 경석(庚碩)이 군사를 시켜 석종을 들어 보았더니 작은 석함의 유리통 안에 사리 4개가 있었다고 한다. 〈양산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 梁山通度寺釋迦如來舍利記〉에는 1379년(우왕 5) 왜구의 침입으로 주지 월송대사(月松大師)가 불사리를 송경(松京)으로 옮겨오자 왕과 왕비가 예를 다하여 공경하여 사리의 분신(分身)을 얻었다고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통도사의 사리가 왜구에 의해 도난당했는데 백옥(白玉)거사가 적의 포로로 있다가 사리를 다시 찾아온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임진왜란을 피해 사리를 대소 2함(函)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는 휴정(休靜)에게 보냈으나 자장의 뜻을 받들어 1함을 되돌려 보내어 1603년 통도사 계단을 중수한 뒤에 봉안했으며, 나머지 1함은 태백산 살나사(薩那寺 : 葛盤寺·淨岩寺)에 안치했다. 그러나 〈건봉사석가치상립탑비 乾鳳寺釋迦齒相立塔碑〉에 의하면 사명대사가 왜구로부터 다시 찾은 통도사의 사리는 금강산 건봉사와 대구(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용연사(龍淵寺) 석조계단에 나누어 봉안했다고 한다. 특히 용연사의 경우 통도사 금강계단을 모방하여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주목된다. 1652년(효종 3)에 정인대사(淨人大師)를 중심으로 중수되기 시작하여 1705년에는 성능대사(性能大師)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고 그뒤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구조는 정방형으로 된 2중 석단 위에 석종형 부도가 안치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과립(顆粒) 3매, 불아(佛牙), 정골지절(頂骨指節)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고 기단의 상하 면석에는 비천상과 불상·보살상을 조각했는데 특히 1층 계단의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상·보살상이 부조되어 있다. 석종부도는 연화대좌 위에 놓여 있고 앞면에는 향로를, 좌우에는 비천상을 양각했는데 조각수법이 부드러운 편이다. 석단 주위에는 석조 난간과 석문이 있으나 모두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금강계단은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쳤지만 창건 당시의 석조물로서 부처의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리를 정암사·건봉사·용연사에도 나누어 봉안했다는 점에서 불사리 봉안사찰의 원류가 되는 가장 오래된 불교 성지라 할 수 있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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