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전국 사찰

서울 북한산 진관사, 죽은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수륙재가 열렸던 사찰

younghwan 2013. 8. 20. 14:42
반응형

 진관사는 서울의 서북쪽 끝, 경기도 고양시와 경계 지점 근처 북한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이다. 신라 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는 절로 원래 이름은 신혈사였는데, 고려현종 때 새로이 크게 건축한 후 진관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절의 내력이 오래된 까닭에 근처의 동네 이름도 진관내동이라고 불리우고 지금은 은평 뉴타운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 진관사에서 북한산 쪽으로는 깊고 아름다운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두개의 바위산 가운데 계곡이 흐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계곡을 통해서 북한산을 오르는 길은 바위암벽이 많아 약간 험한편이다.

 진관사는 현재의 사찰규모로 볼 때는 그 규모가 크지 않고 대부분의 건물들이 한국전쟁이후 중건된 것이라 내력이 깊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불암사, 삼막사, 승가사와 함께 서울 근교 4대 명찰 중 하나이다. 진관사는 고려 목종대에 왕위계승자로 훗날 현종으로 즉위한 대량원군이 당시 권력자로 수렴청정을 하던 천추대후에게 축출되어 유폐되었던 사찰이다. 당시 이곳은 작은 암자이었는데 현종이 즉위한 후 그를 보살폈던 진관대사를 위해 크게 중창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보호를 받았으며, 조선이 개국한 이후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수륙재를 주관하는 사찰로 크게 번창하였다. 조선후기 이후 진관사의 역사에 대해서는 기록에 남아 있는 부분은 많지 않으나, 서울에서 가깝고 주변에는 서오릉.서삼릉 등 많은 왕릉들이 있고, 조선시대 궁궐에서 종사하던 내시.궁녀들의 무덤들 또한 많았기때문에 조선왕실과도 관련이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찰의 성격 또한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수륙재를 지내는 사찰로 후손이 없이 죽은 내시나 궁녀들이 늙어서 이곳을 많이 찾았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산에서도 경치가 수려하고 수량이 풍부한 진관사계곡에 위치한 진관사는 계곡입구를 제외하고는 주위와 연결되는 길이 거의 없는 폐쇄된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계곡입구는 서울과 황해도.평안도 지역을 연결하는 큰 교통로가 있어 사찰이 위치하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찰 전각은 주불전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죽은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명부전을 비롯하여 나한전, 독성각, 칠성각 등의 불전이 있고, 왼쪽편에 요사채들을 배치해 두고 있다. 사찰의 성격은 수륙재을 주관하는 사찰로 명부전이 중시되고 있으며, 나한전.독성각 등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승려들이 수행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찰은 1900년대초 크게 중창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나한전.독성각.칠성각을 제외한 대붑분의 전각이 불타버렸던 것을 최근 중창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조계사의 말사로 북한산에 소재한 대표적인 비구니 수행도량이라 할 수 있다.


북한산 계곡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진관사 전경. 주불전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명부전을 비롯한 불전들이, 오른쪽에는 승려들이 기거하면서 수행하는 공간인 요사채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2009년 여름. 대웅전 앞 마당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고 잔듸가 깔려 있었다. 궁궐이나 사찰 주불전 앞 마당은 법회가 열리는 장소이며 석탑이 위치하고 있어야 하나 정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지금은 나무를 없애고 일반 사찰처럼 넓은 마당으로 바뀌었다.


진관사 일주문.


일주문 안쪽 소나무숲.


진관사 일주문을 지나 숲길을 따라서 2~3분쯤 걸어가면 북한산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있고 정면에 또다른 산문이 세워져 있다. 진관사는 서울 근교에 위치한 사찰로서 전통사찰에서 볼 수 있는 천왕문이나 금강문. 불이문같은 출입문이 별도로 없고 최근에 세워진 산문이 있다.


북한산 진관사 계곡. 계곡이 깊어서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한 편이다.


실제 진관사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강당겸 누각 건물인 홍제루. 앞면 3칸 옆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홍제루는 누각겸 강당건물로 1층은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2층에는 신도들이 잠시 쉬어가거나 강론이나 집회등을 열 수 있는 장소이다. 현재의 건물은 1977년에 신축한 건물로 왕실과 관련된 서울 근교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진관사 주불전인 대웅전. 한국전쟁때 불타버린 것을 1965년에 중창하였다고 한다.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불전으로 앞면3칸으로 이루어진 전통 사찰의 주불전에 비해서 크게 지었다.


명부전은 지장보상를 모신 불전으로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전쟁 등으로 죽은이들을 위로하는 수류재을 거행하던 진관사의 내력과 궁궐에서 살다 후손이 없이 죽어야 했던 많은 내시.궁녀들이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진관사는 예전부터 명부전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불전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명부전 왼쪽편에 있는 나한전. 한국전쟁 때 불타지 않고 남은 불전으로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진관사에 부처의 제자들인 나한을 모신 나한전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진관사는 수행을 중시하는 수행도량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진관사 독성전
이 건물은 독성 즉 나반존자를 모신 건물로 1907년에 짓고 1969년에 다시 지었다. 나반존자는 부처님이 열반한 뒤 중생을 구하고자 천태산에서 홀로 수도한 아라한을 가리킨다. 조선후기 사찰에는 나반존자와 산신, 칠성을 한 전각에 모신 삼성각을 지었다. 때로 나반존자만 모신 독성각을 짓기도 했는데, 진관사에서는 이의 격을 높여 독성전이라 불렀다. 건물은 간살이 좁은 단칸의 맞배집으로 크기가 아주 작다. 안에는 간소한 불단을 두고 소조독성(나반존자)상과 독성도, 산신도를 모셨다. 소조독성(나반존자)상은 높이 37m가량 되는 작은 상으로 흙으로 빚어 색을 칠했다. 독성도는 건물이 지어진 1907년에 그려졌다. 가로로 길게 구도를 잡아 그린 이 그림은 천태산을 배경으로 앉은 나반존자와 동자 등을 표현했다. 상국 4인과 민간부부 두쌍이 독성전을 후원하고 공사는 승장이 맡았으며, 상궁이 시주해서 독성도를 그렸다. <출처:서울시청>

진관사 산신도
이 그림은 진관사 독성각에 모셔진 산신도다. 언제 그려졌는지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독성각이 세워진 1907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호랑이에 기대고 있는 산신은 붉은색의 옷을 입고 머리에는 높은 망건을 쓴 노신선의 모습이다. 수염이 세밀하게 묘사된 산신의 얼굴은 마치 인자하게 웃고 있는 온화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비슷하다. C자형으로 휘어져 있는 호랑이는 해학적이고 익살스러운 민화의 표범을 떠올리게 한다. 그림은 밝은 진홍색과 녹색이 조화를 이루고 여기에 호랑이의 황색과 흰색 등이 어울려 밝은 느낌을 준다. 이 산신도는 산신도의 배경을 즐겨 그려진 산과 나무를 생략하고 호랑이와 산신만을 대담하게 강조하면서 그 구도를 단순하게 한 점이 돋보인다. <출처:서울시청>


한국전쟁 때 불타지 않고 남았던 불전 중 하나로 스스로 수행하여 홀로 깨친 성자로 여겨지는 나반존자(독성)를 모신 불전인 독성전. 내부에 산신도가 모셔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산신각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면 1칸의 단촐한 건물이다.

진관사 소 독성상과 독성도
진관사 독성각에는 나반존자상(독성상)과 독성도가 모셔져 있다. 1907년에 독성각이 세워졌는데, 같은 해 독성도와 독성상도 함께 조성되었다. 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하고 있는 나반존자는 일명 '홀로 깨친 성자'라 해서 '독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존자상의 머리는 삭발했으며 얼굴은 유난히 크다. 눈.코.입 중에 특히 뭉뚝하고 크게 생긴 코가 인상적이다. 2m가 넘는 거대한 독성도는 산수를 배경으로 나이 든 비구가 오른손으로 땅을 짚고 왼 무릎은 세워 왼손으로 긴 주장자를 집고 있는 자세가 편안해 보인다. 이 작품은 1907년에 그린 화승 응석의 대표작이다. 이 독성상과 독성도는 1900년 전후의 독성상과 독성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그 가치가 크다. <출처:서울시청>


진관사 소독성상과 독성도

진관사 칠성각
칠성각은 1907년에 지어진 것으로 불교에 흡수된 민간신앙인 칠성신을 모신 건물이다. 진관사는 1900년대 초 크게 고쳐 지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나한전과 독성전, 칠성각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예로부터 북두칠성은 재물과 재능을 주고, 수명을 관장하며, 비를 내려 풍년을 들게 하는 신으로 민간에서 널리 받들었다. 칠성각은 앞면3칸, 측면1칸 규모의 맞배집으로 그 구조는 아주 간소하다. 안에는 뒷벽에 붙여서 불단을 놓고, 석불좌상과 칠성도, 영정 1점을 모셨다. 석불좌상은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신체와 얼굴 모두 아기처럼 작게 만든 것으로 보아 원래는 천불상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1910년에 제작된 칠성도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칠성과 여러 성군을 그린 불화다. 진관사는 1012년(고려 현종3) 정쟁에 휘말린 현종을 도운 진관대사를 위해 세운 절이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제를 열었던 수륙도량으로 명성이 높았다. <출처:서울시청>

진관사 명호스님초상
이 그림은 진관사 칠성각에 모셔져 있는 명호스님의 초상이다. 원래 북한산의 인수사에 모셔져 있는데 이는 '인수사절 명호불영명'이라는 화기에서 알 수 있다. 그림 중심에는 온화한 인품을 느끼게 하는 인자하고 예지에 찬 얼굴과 훤칠한 모습의 명호 스님이 있고 좌우에 동자승이 그려져 있다. 그림에서 명호스님은 푸른 감색 장삼 위에 붉은색 가사를 걸치고 있으며, 왼손에는 긴 주장자를 짚고 오른손으로 염주를 굴리면서 경전 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덕이 높은 스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성연대는 정확히 쓰여 있지 않으나 고승과 좌우 동자승 등 삼존구도의 영정과 희귀한 한글 화제, 온화한 고승의 형태적 특징 등에서 19세기 말기의 초상으로 생각된다.

진관사 칠성도와 석불좌상
칠성각에는 치성광후불도와 치성광석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직후인 1910년 10월에 조성되었으므로 역사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칠성도는 옆으로 구성된 횡열식 구도인데, 그 중아에 치성광불과 일광.월광 등 삼존불이 있고, 이 좌우로 앞줄에 칠원성군이 나란히 서 있다. 뒷줄에는 칠성을 부처님으로 변화시킨 칠불이 한 줄로 나란히 있는데, 이 가운데 한 분씩 바뀐 채 배치된 구도가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높고 뾰족한 불상으 육계와 긴 얼굴, 얼굴과 팔 등의 금색, 성군들의 높은 보관과 보관의 금장식, 홍색 위주의 가사와 도포 등과 같은 것을 화사하게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칠성도 앞 치성광불로 모셔진 34cm의 작은 돌로 된 석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와같은 얼굴과 신체는 순진무구한 부처님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세기 말경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석불로 그 가치가 크다.


진관사 칠성각.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불전으로 내부에 칠성도와 석불좌상, 명호스님초상 등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는 일제강점기 승려 백초월의 독립운동 사료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칠성각에서 발견된 백초월 스님의 독립운동 사료 안내


대웅전 앞 마당 왼쪽편에 위치한 요사채인 동별당.


대웅전 앞 마당 오른편에 위치한 요사채 건물이 나가원.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대웅전 앞 마당.


마당에 있던 석조 또한 구석으로 옮겨졌다.


범종이 걸려 있는 동정각


요사채 건물인 서별당.


진관사 앞 큰 길.


진관사 홍제루 맞은편 계곡에는 최근에 지은 요사채건물이 있다.


사찰 입구의 다실


진관사 입구


진관사 들어오는 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