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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산성 9

서울 용마산 보루(사적455호), 고구려군이 아차산 일대에 쌓은 보루

아차산보루군은 삼국시대 한강유역 패권을 다투던 5~6세기에 한성백제의 왕성이었던 풍납토성, 몽촌토성 지역을 압박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쌓았던 소규모 군사요새로 남한 최대의 고구려 유적지이기도 한다. 현재까지 아차산보루, 용마산보루, 시루봉보루, 수락산보루, 망우산 보루 등 17여개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 10여개가 고구려군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용마산보루는 아차선 능선 북쪽의 4보루 북쪽 능선에서 시작하여 용마산 일대 능선에 쌓은 보루를 말하며 용마산 정상을 비롯하여 7곳의 보루가 확인되었다. 보루는 주로 중랑천 일대 넓은 평야지대를 감시.장악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이며 정상부 부근 능선에 3곳, 평지와 가까운 낮은 곳에 4곳의 보루가 확인되었다. 용마산보루에서는 고구려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연..

포천 반월성 (사적 403호), 한강유역과 함경도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지키는 신라산성

포천 반월성은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에 있는 해발 283.5m의 청성산을 중심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그 형태가 반달과 같다고 하여 반월산성이라고 부른다. 포천지역은 추가령지구대를 따라서 형성된 서울과 함경도 동해안 원산, 함흥지역을 연결해 주는 주요 교통로 위치해 있는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려온 한맥정맥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화악산, 명지산, 운악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산들 즐비하며, 서쪽으로는 소요산, 왕방산 등 500m 이상 놀은 산들이 연결되어 있다. 포천은 대체로 양쪽 산맥사이에 형성된 비교적 넓은 분지에 형성된 넓은 농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월성이 있는 청성산은 포천지역 분지의 북쪽 끝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이지만, 지형적으로 남쪽분지의 평야지대와 철원지역으로..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남문인 종해루와 주변 성벽, 양헌수 승전비

정족산성은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우리를 능선을 따라서 연결한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의 방향은 강화해협(염하)를 바라보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지금은 정족산성 동쪽편으로 넓은 간척지 평야가 펼쳐져 있지만, 원래는 넓은 갯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안을 따라서 구축한 돈대와 함께 강화도 남쪽 해안과 연안 해로인 강화해협을 감시하고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산성으로 생각된다. 이 곳은 오랜 옛날부터 천혜의 요새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정족산 사고가 산성내에 설치되어 있다. 정족산성의 주출입문은 남문으로 실제로는 산성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계곡의 시냇물이 흘러 내려가는 방향이다. 일반적인 산성과는 달리 평지와 비슷한 고도에 성문이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과도 상당..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서문에서 동남쪽 치성(雉城)까지

강화 정족산성은 둘레 약 1km로 주산인 해발 220m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전등사와 정족산사고가 있는 계곡을 에워싸고 있는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이 산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벽을 축조하고 있는 석축의 형태 등으로 유추해 볼 때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하고 있다. 정족산성에는 주출입문인 종해루가 있는 남문을 중심으로 동문, 서문, 북문을 두고 있다. 남문에는 문루를 두고 있고, 북문은 암문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정족산성 서문은 조선후기 강화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조직인 진.보 중에서 강화도 남쪽 해안을 지키는 돈대를 관장하던 선두보가 위치하고 있다. 방어상 취약지역인 남문과 동문과는 달리 서문은 선두보와 연결되는 출입구이자,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연결로이..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정족산(해발220m) 정상 부근 성벽

강화 정족산은 해발 220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높은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정상부에 올라서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 지금은 많은 간척이 이루어져서 강화도에 넓은 농토가 많지만, 원래는 드넓은 갯벌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족산 정상에 올라서면 북쪽으로는 고려시대 왕릉들이 있는 진강산이 보이고 그 사이에 넓은 평야가 들어서 있다. 서쪽편으로는 강화도의 명산이라고 할 수 있는 마니산과 그 너머로 석모도와 서해바다가 보이고 동쪽편으로는 강화해협과 문수산성, 김포지역이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편으로 길상산과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족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해 왔던 산성으로 강화해협(염하), 한강하구, 서해안 연안 항로를 지키는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요지였던 것으..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강화해협(염하)가 내려다 보이는 동문에서 북문까지

강화도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성은 그리 높지 않은 해발 220m의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 우리가 솥다리처럼 받치고 있어서 정족산성 또는 삼랑성이라고 불린다. 이 성을 쌓은 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바깥쪽에 돌을 쌓아 석축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의 산성은 거친 활석을 비롯하여 잔돌로 촘촘하게 석축을 쌓았는데 서울의 아차산성이나 고구려가 쌓은 여러 산성들과 입지나 석축을 쌓는 수법이 비슷한 것으로 볼 때 고구려가 백제를 몰아내고 한강유역 패권을 잡은 이후에 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족산성은 서북쪽 해발 220m의 정족산이 가장 높은 산이고, 남쪽편과 동쪽편에 비슷한 높의 봉우리들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등사와 정족산 사고가 있었던 산성내부는 강화해협(염하)가 있..

서울 아차산성, 백제 수도 위례성이 내려다 보이는 산성

서울의 동쪽 경계인 지금의 워커힐 호텔이 있는 뒷산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이다.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아차산에 쌓은 산성이다. 백제가 수도 위례성을 방어하기 위해 처음 쌓았으며, 이때는 토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구려가 아차산성을 점령하고 이 일대에 군사시설인 보루를 건설함으로써 백제 위례성에서 물러나 공주지역으로 수도를 옮길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성곽은 중간크기 돌을 촘촘하게 쌓고 있는데, 고구려 산성축조법의 영향을 받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아차산성에서 백제 개로왕이 전사하였다고 하며,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후 고구려의 온달장군 또한 이곳에서 전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아차산성에서 거의 유일하게 산성임을 눈으로..

단양 온달산성, 온달장군 전사한 장소라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

온달산성은 단양에서 남한강을 따라서 상류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소백산자락 아래 남한강변 성산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이다. 삼국시대에서 신라 전성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고구려와 신라 간에 힘겨루기가 치열하게 있었던 장소로 고구려 온달장군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산성의 이름은 온달산성으로 고구려 산성으로 여겨지는 곳이지만, 산성이 위치한 장소가 북쪽으로부터의 적을 제압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아서 신라의 산성으로 여겨진다. 성을 쌓은 방법을 보면 작은 돌로서 촘촘하게 쌓은 것이 아차산성 등 고구려 산성과 비슷하기도 하며, 신라가 쌓은 보은 삼년산성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신라 간에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곳 온달산성에 올라가면 남한강..

충주 장미산성(忠州薔薇山城), 남한강이 굽어보이는 삼국시대 고구려 산성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간 분쟁이 많았던 지역인 충주 인근 남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장미산성입니다. 고구려와 신라가 세력권의 표시로 만들어 놓은 중원고구려비와 중앙탑이 있는 곳에서 자동차로 남한강변을 따라서 하류로 10여분 내려오면 있는 남한강 서쪽편 장미산에 장미산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장미산성 중앙인 장미산 정상에 올라서면 남한강 상류쪽 충주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서 이 장미산성이 당시 국방상의 중요한 요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미산성 성벽의 일부는 온전하게 남아있고 많은 부분은 허물어져 있지만 산성 자체는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충주 남한강변 중원고구려비와 중앙탑이 있는 지역에서 남한강 하류쪽로 도로를 따라서 자동차로 10여분 내려오면 남한강 서쪽편에 있는 나지막한 장미산이 있는 삼국시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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