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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19

백제 왕실의 후원을 받아 창건된 부여와 익산의 사찰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 때(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東晉)에서 백제로 건너와 처음 전래되었다. 이후 백제 불교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많지 않지만 일반인들 사이에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성왕 때(526년) 겸익(謙益)이 인도로 방문 후 블경을 가지고 돌아와 범눈으로 된 불경을 번역하였다. 또한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경과 불교문화와 관련된 인물들을 청했으며 일본에도 불교를 전하여 한국과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왕대 이후 불교는 국가 중심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적인 성격의 계율종(戒律宗)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백제는 왕실의 후원으로 수도 부여에 많은 사찰이 세웠으며, 무왕 때에는 새로운 도읍을 건설할 목적으로 큰 사찰들이 세워졌다. 백제 사찰은..

[한성백제박물관] 한강유역의 신라

삼국시대 한강유역은 475년 고구려가 백제 수도 한성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가 76년간 장악하였다. 이후 백제는 신라와 연합해 한강유역을 되찾기는 했으나 553년부터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래 통일신라가 멸망하기까지 약 350년간 신라의 주요 거점으로 존재했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뒤로 중국과의 뱃길을 확보하고 지방조직인 한산주를 설치하였으며 여러 산성을 쌓았다. 한강유역의 대표적인 신라 유적지로는 하남 위례성 동남쪽 남한산성 자라게 쌓은 이성산성을 들 수 있다. 이성산서은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둘레 1.6km의 산성이다. 이곳에서는 신라가 쌓은 산성 석축을 비롯하여 자.방망이.톱 등 다양한 생활유물도 출토되었다. 신라, 마침내 한강으로 삼국 가운데 국가체제 정비가 가장 늦었던 신라는 5세기 이..

지역박물관 2014.04.05

[한성백제박물관] 한성기 이후 백제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강한 압박을 받아 개로왕이 죽고 한성을 버리고 남하하게 된다. 새로운 도읍지로 금강을 방패삼아 공산성이 있는 웅진으로 왕성을 옮기게 된다.이후 538년 지형적으로 좁은 웅진을 버리고 넓은 평야를 배후에 두고 있는 사비성으로 옮겨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존속하게 된다. 백제가 수도를 웅진(공주)과 사비(부여)에 자리를 잡았던 시기는 약 200여년의 백제 역사에서 27% 정도의 기간이지만 오늘날 남아 있으면서 잘 알려진 백제유적과 유물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강유역에 물러난 이후 백제는 주변국과의 동맹에 크게 주력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중국 남조, 왜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비롯하여 다양한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일본에..

지역박물관 2014.04.02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의 대외교류

백제는 한반도에서 대외교류가 가장 많았던 국가 중 하나였다. 삼국시대는 한나라 멸망 이후 5호16국에서 남북조시대까지 중국에서 크고 작은 많은 나라들이 성쇠를 거듭하던 시기로 혼란스러웠던 측면도 있지만, 다양한 세력간에 많은 교류가 있었던 시기이다. 또한 고조선 멸망이 낙랑군이 중국,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해상교역의 중심이었다가 고구려의 압박으로 낙랑군이 물러난 이후 백제와 가야가 해상교역의 중심이었다. 또한 삼국시대에는 황해도 연안과 산동반도를 잇는 항로가 개발되어 더 많은 물자와 사람의 교류가 있었다. 한성기 백제는 주로 남조, 가야, 일본과 강한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정치.경제적인 교류가 있었는데, 이는 를 비롯하여 많은 역사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출토유물에서도 당시의 교류관계를 잘 ..

지역박물관 2014.03.27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인의 생활모습

백제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은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역사에 기록된 내용과 출토된 유물, 고구려를 비롯한 주변 지역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 등을 종합하여 추론하고 있다.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출토된 유물로 추정할 수 있는 백제인들의 식생활은 당시 중국이나 동아시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쪄서 먹었으며, 곡물은 끓여서 죽처럼 먹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의 여러 집터에서 출토된 계란모양토기와 시루는 지금도 사용하고는 음식을 찌는 용기이다. 또한 그릇으로 보이는 깊은바리토기는 죽을 먹기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백제인의 복식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러 기록에 고구려와 비슷하다고 하며, 고구려벽화에 나타난 복식과 유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들..

지역박물관 2014.03.23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의 지방통치

백제는 기원전 18년 졸본부여에서 남하한 세력이 한강유역 토착세력과 함께 세운 나라이다. 초기 성읍국가 연맹체였던 마한의 소국이었지만, 북방에서 남하한 세력으로 북방유목민과 중국 대륙의 선진 문물과 기술을 바탕으로 점차 한반도 중부지역을 장악하면서 마한지역 전체를 장악하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백제가 남하하는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웅진(공주)로 천도하기까지 왕도 한성(하남 위례성)은 백제 역사의 73%에 해당하는 493년간 왕성으로서 백제의 전성기를 보냈던 곳이다. 백제는 3세기 중반 한반도 중부지역을 장악하면서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4세기 후반에는 고구려를 압박하면서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고, 남쪽으로는 남해안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한반도 지역 성읍국가들이 점차 고구려, 백제,..

지역박물관 2014.03.19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의 건국과 하남 위례성

백제는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기원전 18년부터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660년까지 678년간 한반도 서부와 남부에 존재했던 국가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신화에 따르면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아들인 온조와 비류가 권력투쟁에 밀려서 한반도로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이런 건국신화를 바탕으로 백제는 부여,고구려 유민집단이 토착세력과 연합하여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크고 작은 성읍국가의 연맹체인 삼한이 존재했으며, 백제는 한반도 중부와 서부지역의 마한연맹체 일원으로 출발하였다다. 당시 마한에는 천안지역에 근거를 둔 목지국이 연맹을 주도했으나, 북방에서 남하한 백제는 중국대륙과 북방유목민의 영향으로 기술이나 문화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이며, 점차 마한내에서 주도세력으로 부상하..

지역박물관 2014.03.17

[청주박물관] 백제, 중원을 선점하다.

금강 중류의 청주지역과 남한강 중류지역의 충주지역을 포함한 충북지역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큰강과 내륙교통로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서 고대 이래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중.일 해상교역로가 중요시 되었던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변방지역으로 천안부근에 있었던 목지국의 영향하에 있었은 작은 성읍국가들로 주요 교통로로 들판에 자리잡고 있다. 마한의 주도국이라 할 수 있었던 목지국이 낙랑과의 투쟁으로 그 세력이 약해지면서 한강하류에 자리잡았던 백제가 마한의 주도 세력이 되면서 마한 전체에 그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백제가 한강유역에 확고한 세력을 갖추었던 4세기 충북지역은 백제의 세력권에 있었지만, 5세기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남한강 유역은 당대 최대의 격전장이 되었고, 백제는 점차 이지역에서 고구려, 신라..

지역박물관 2013.01.21

연꽃이 아름다운 부여 백제 궁남지 (사적 135호)

경주에는 안압지가 있다면, 백제의 수도 부여에는 궁남지가 있다. 궁남지는 익산 미륵사지와 함께 백제 무왕의 서동과 선화공주의 전설이 담겨있다. 궁남지는 규모나 아름다움으로는 안압지에 못지 않고 호젓한 산책을 하기에 아주 좋다. 안압지에 비해 왕궁건물 터 같은 인공적인 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연못자체 만으로도 매우 아름답다. 궁남지는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 사비성의 별궁 연못으로 사적 135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무왕때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에 따르면,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여들였으며,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고 도교적인 사상이 반영된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을 조성한 전형적인 정원의 연못으로 비교적 이른 시지에 조성된 것으로 신라 임해전지를 비롯하여 후대 궁궐 정원 연못 조성에 큰 영..

조선 관아 2012.06.19

[부여박물관] 백제의 멸망과 의자왕, 후대 사람들이 본 백제와 부여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년)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재위 초기인 642년에는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40여성 빼앗는 등 신라에 큰 타격으로 주었다.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와 당나라의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는 등 내.외적으로 백제의 국력을 회복하는데 힘썼다.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사비성이 포위되자 웅진성으로 피신했다가 항복아여 태자와 함께 당나라에 압송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신라군이 육로로 김유신이 이끄는 5만명의 군대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의 오천결사대를 격파했으며, 당나라의 소정방과 신라의 김인문이 이끄는 연합군이 금강수로를 이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백제의..

지역박물관 2012.06.15

[중앙박물관 백제실] 백제의 지방세력 (영산강 유역 출토 유물)

한강유역 하남위례성에서 출발한 백제는 삼한시대 마한의 영역이었던 한반도 서남부지역을 장악하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영역 중 수도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영산강 유역은 옛 마한의 근거지이자, 한.중.일 해상교통로에서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며, 넒은 평야를 끼고 있어서 오랫동안 강력한 지방세력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한의 근거지였던것으로 추정되는 나주 반남면 일대 자미산성 주변으로는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에 상당히 규모가 크고 많은 수의 고분이 존재하고 있으며, 영산강 이북에는 나주 복암리를 비롯하여 여러지역에 지방유력세력의 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산강 유역의 고분들은 마한시대의 것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백제시대 지방 유력자들의 그 고분이다. 이들 ..

중앙박물관 2011.04.22

공주 정지산유적 (사적 474호), 백제의 제사 시설터로 추정되는 유적지

공주 무령왕릉과 송산리고분군이 있는 송산의 북쪽 끝자락에는 백제가 웅진을 도읍으로 하던 시절에 제사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정지산 유적지가 있다. 백제왕릉이 있었던 산에서 금강이 내려다 보이는 이 곳 정지산 유적지를 실제로 찾아가 보면 눈으로 볼 수 있는 옛날 시설물이나 건물흔적 등을 볼 수는 없고 이 곳이 백제시대 제사시설이 있었다는 표지석만 홀로 서 있다. 그렇더라도 당시 사람들이 이 곳에 제사시설을 설치한 이유나 그들이 이 곳에서 느꼈을 느낌같은 것들을 조금이나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정지산 유적은 공주에서 금강이북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인들은 능선 정상부를 평평하게 조성하여 제단같은 건물을 짓고, 그 외곽에 목책과 도랑으로 주위와 격리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백제 무녕왕릉 있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주 송산리고분군은 무녕왕릉으로 유명한 대표적인 백제 고분군으로 공주를 도읍으로 정했던 시기의 백제 왕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경주 왕릉에 비해서 크기도 크지 않고 내부는 중국 남조 귀족들의 무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가 남조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서 그런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공주의 도읍인 공산성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서방을 죽은자들의 땅이라는 사상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외형적으로는 화려한 면모가 거의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는 무녕왕릉을 포함하여 7기의 왕릉이 금강변 구릉에 남쪽 방향을 보면서 줄지어 있다. 공주 공산성 서쪽 금강변 구릉에 위치하고 있는 송산리 고분군. 공주가 백제의 수도였던 시기 왕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며, 위쪽에 1~4호분이,..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영산강 유역의 백제문화, 독무덤과 움무덤

영산강 유역은 마한시대부터 토착세력이 발전한 곳으로 3세기 후반 ~ 4세기 초에 독널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였다고 한다. 독널은 금동관, 금동신 등 화려한 꾸미개와 무기가 출토되기도 한다. 그래서 마한 이후의 이지역 토착지배세력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영산강 유역의 고분은 나주 반남면을 중심으로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영산강 일대에 많은 곳에서 당시의 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전남 영암에서 출토된 전형적인 영산강 유역의 독무덤에서 발굴되는 독널. 독널은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지에서 널리 사용된 양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한성 백제기에 영산강 유역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나주 반암면 신촌리고분. 나주 반암면 일대 신촌리, 대안리, 덕산리에 많은 고분들에서 독무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영산강 유역 독무덤에 출토된..

중앙박물관 2010.01.03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백제의 토기

백제의 토기는 한성기, 웅진기, 사비기의 토기로 분류할 수 있다, 한성기의 토기는 이전의 토기 제작기법에 낙랑과 고구려의 기술이 더해져서 실용성이 돋보이는 토기들이 제작되었다. 웅진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토기가 제작되었는데 실제 발굴되는 유물은 무덤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사비기에는 그룻 뿐만 아니라 다양한 용도의 토기가 만들어졌고, 토기의 규격이 통일되었다고 한다. 한성기의 토기 백제 토기는 이전의 전통적인 토기 제작 기법에 낙랑과 고구려의 기술이 더해져 만들어졌다. 토기의 형태는 매우 다양해졌는데, 꾸밈을 자제한 실용성이 돋보이며 부드럽고 우아한 것이 특징이다. 한성기에는 백제 고유의 토기인 검은간토기와 세발 접시가 등장하고, 곧은목항아리.장란형 토기 등도 만들어졌다. 웅진기의 토기 사비기의 토기. ..

중앙박물관 2010.01.02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백제의 제사의식, 대외교류

백제에서는 풍요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한 여러가지 형식의 국가 제사를 행해졌으며 그 중 부안 죽막동 유적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던 곳으로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제사가 지내졌던 곳이다. 그리고 백제는 중국과 일본간의 교류에 있어서 항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다양한 형태의 유물들이 남아 있다.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 출토된 제사와 관련된 유물들 부안 죽막동은 격포만 해안 적벽강 절벽 위에 있다고 한다. 부안 죽막동 유적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서해안의 전북 격포만에 위치한다. 이 곳은 일본-남해안-서해안-중국을 이어주는 요충지이다. 제사는 절벽 위의 좁은 평지에서 행해졌으며, 약 10 m 범위 안에서 삼국시대부터 조..

중앙박물관 2010.01.02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백제의 철기 문화, 무기류와 말갖춤

백제의 철기 문화는 각종 무기류와 농기구 들로 대표할 수 있다. 삼국시대 이후 철기 유물로 주로 무기류에 사용되어지면 철기의 특성상 많이 녹이 슨 상태로 발굴되어 후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크게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분명히 발전된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철기를 만드는 도구. 철을 단조하여 단단하게 만드는 망치와 집게가 출토되었다. 충남 천안에서 출토된 백제의 말갖춤. 부여 부소산성 출토된 무기류들. 주로 성을 지키는 무기들로 낫과 갈고리는 성벽을 올라오는 적을 막을 때 사용하며, 마름쇠는 땅 위에 뿌려 놓아 적의 접근을 막는 무기이다. 고리자루칼. 전남 나주 복암리 무덤 출토 유물 낫, 칼, 갈고리 백제의 철기는 농기구와 무기로 대표되며 다양한 형태가 있다. 특히 한성기 유적인 서..

중앙박물관 2010.01.02

익산 왕궁리유적, 유물전시관

오층석탑이 있는 왕궁리 입구에는 왕궁리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왕궁터였던 때부터 사찰로 변한 이후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유적 전시관이 있다. 이 전시관에는 왕궁터 전체의 모습과 당시의 생활상의 모습 등을 재현해 놓고 있으며, 기와 등 건축 부재를 중심으로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백제 왕궁터가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 많지 않기때문에 백제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왕궁지를 설명하고 있다. 왕궁리는 무왕이 조성한 왕궁지와 후대의 사찰 유적이 같이 있는 곳으로 경복궁 등의 궁궐과 같이 앞쪽은 정전을 중심으로 의례적인 공간이, 뒷쪽은 생활공간이 흔적이 남아 있다. 왕궁리 유적지는 백제 궁궐지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인장와는 기와..

지역박물관 2009.12.15

일본 최대의 목조건물 동대사(東大寺) - 나라공원

나라 시 동부의 나라 공원은 동서 약 4킬로미터, 남북 약 2킬로미터, 넓은 잔디받에 많은 사슴이 있는 공원으로 원내에는 도다이샤 절, 고후쿠지 절, 가스카타이샤 등, 일본을 대표하는 절과 신사가 있다. 작은 시냇물이나 연못과 혜자가 경관에 윤택함을 더하여 나무들 사이에 있는 절과 신사의 큰 지붕과 탑이 보이는 경치는 사계절을 내내 아름다우며 연중 찾는 사람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도우다이샤는 728년, 불교를 중시한 쇼우무 천황의 명으로 건립된 전국 68개소에 있었던 국분사의 총본산으로 헤이죠우교의 동쪽에 선 큰 절이라는 의미로 '동쪽의 절(도우다이샤)’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폭 57미터, 안쪽으로 50미터의 세계 최대 목조건축인 도우다이샤 대분전에는 높이 15미터가 넘는 ..

일본(Japan) 2009.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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