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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19

[창경궁] 관덕정, 국왕이 활을 쏘던 활터 정자

창경궁 후원 춘당지 뒷편 언덕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서양식 온실이 있고, 그 동쪽편으로 국왕 활을 쏘던 활터인 관덕정이, 서쪽편으로는 작은 연못인 애련지와 순조대에 일반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연경당이 있고, 그 안쪽으로 크고 작은 연못들과 정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국왕이 거처하는 궁궐로 자리잡았던 동궐(창덕궁과 창경궁)에서 이 지역은 건물들은 많이 들어서 있지 않고, 국왕과 왕실가족들이 자연을 즐길 수 있는 큰 정원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초에 지은 경복궁이나 중국 북경의 자금성과는 달리 상당히 넓고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넓은 공원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대춘당지가 있던 곳에는 국왕이 직접 농사를 짓던 논도 있었기때문에 궁궐 안에 하나의 ..

궁궐_종묘 2012.09.21

[창경궁] 춘당지, 창경궁 후원의 큰 연못

춘당지는 창경궁 후원에 있는 큰 연못으로 창경궁을 대표하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동물원 시절부터 창경원으로 대표하는 장면으로 많이 알려진 곳으로 창경궁 후원의 울창한 수목과 함께 도심속에서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다.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운 정원이 동궐 후원의 여러 연못을 지나서 흘려 내려온 냇물이 모여서 큰 연못을 이루고 있는 춘당지는 위쪽의 작은 연못인 소춘당지와 아래쪽의 큰 연못이 대춘장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춘당지에는 도교의 낙원을 상징하는 작은 섬이 조성되어 있다. 많은 전각들로 가득찬 경복궁과는 달리 창경궁은 동궐 후원과 연결된 울창한 숲과 산책로 덕분에 도심에서 잠시 숲을 즐기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도심공원이 되기도 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창경궁에는 소춘당지만 있었고 아래쪽 대..

궁궐_종묘 2012.09.20

창경궁 대온실, 일제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조성하면서 지은 서양식 건축물

창경궁 후원 춘당지 뒷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인 창경궁 대온실이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조성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로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에 유리로 둘러싸고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창경원이 동물원으로 조성되면서 지어진 대부분의 시설들은 지금 철거하고 남아 있지 않지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축물로 근대건축물로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축물로 궁궐건물과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원래 궁궐 후원에는 궁궐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진귀한 동물이나 식물들을 기르는 정원을 두는 것이 세계적으로도 보편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 동궁 후원이었던 경주 안압지에서 희귀 동.식물을 길렀다는 ..

창경궁 팔각칠층석탑 (보물 1119호), 라마탑을 연상시키는 중국의 석탑

창경궁 후원 춘당지 연못가에 세워져 있는 조선시대 석탑인 보물 1119호로 지정된 창경궁 팔각칠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원래 창경궁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가져온 상인으로부터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해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1층몸돌에 이 탑을 세운 연대가 1470년대임을 알려주는 명문이 적혀 있다고 한다. 이 탑은 우리나라 석탑은 아니고 중국의 것으로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탑은 팔각의 평면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3단의 바닥돌 위에 1단의 기단을 올려 놓고 그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워 올렸다. 1층 몸돌은 볼록한 형태이며, 2층부터는 목조건축물의 지붕처럼 전형적인 동아시아 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부에는 각면마다 꽃무늬 등을 새겨 놓고 있다. 전체적으..

창경궁 성종태실 및 태실비

조선시대 왕실에서 출산과 교육은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근간으로 왕실 자손을 얻고 교육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실에서는 태교를 통하여 안전한 출산과 건강한 아기의 탄생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를 위해 산실청을 설치하는 등 필요한 많은 조치들을 취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태어난 아기의 태를 갈무리하는 것이데, 이는 아기의 장수와 복을 비는 것으로 중요한 국가적 행사로 삼았다고 하며, 태실도감을 설치하여 태를 봉안하고 태실을 설치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태는 깨끗히 씻은 후 항아리에 보관하여 전국 각지의 풍수가 좋은 곳에 묻었다. 창경궁 후원 언덕에는 특이하게 성종의 태실과 태실비가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대부분의 조선왕실 태실을 모아서 고양 서삼릉으..

창경궁 관천대(보물851호), 국왕이 직접 천문을 관측하던 관천대(觀天臺)

창경궁에 있는 관천대는 현대그룹 계동사옥 앞에 있는 관산감관천대와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2개의 관천대 중의 하나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조선 후기 숙종 14년(1688)에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천문관측 시설로 많지 않은 유적중의 하나이다. 관천대는 높이 3m로 화강암으로 만든 석대 위에 조선시대에 가장 정밀한 천문관측대인 소간의가 설치하여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였다고 한다. 관상감 관천대는 실무관리들이었던 서운관(관상감) 관원들이 천체를 관측하던 실무용인데 반해서, 창경궁 관천대는 국왕이 직접 천문을 관측하는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천문학을 제왕의 학문으로 여겨 매우 중시하였는데, 이는 해와 달의 움직임과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각과 절기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 매우 중요..

창경궁 풍기대(보물 846호),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던 기상관측기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던 깃발을 세웠던 풍기대는 경복궁과 창경궁에 남아 있다. 창경궁 집복헌 뒷편 언덕에 남아 있는 풍기대(보물846호)는 화강암 석재로 만들어졌으며, 풍기대 위에 깃대를 꽂고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측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 228.1cm로 개다리상 모양의 하부대석과 상부 팔각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24방향으로 측정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바람의 세기와 방향의 측정은 측우기와 같이 농업에 필요한 기상현상을 측정하는 것으로 조선 세종대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곳 창경궁 풍기대는 영조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위치가 원래의 위치인지는 정확한 설명은 없으나 바람이 많이 부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기대와 앙부..

[창경궁] 영춘헌과 집복헌, 후궁들의 거처로 사도세자가 태어나고 정조가 승하한 곳

창경궁 내전의 중심건물인 통명전과 양화당 일대는 대비를 비롯하여 왕실이 어른이 거처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궁궐에 속한 많은 후궁들과 궁녀, 어린 왕실 가족들이 거처하는 왕실의 생활공간으로 궁궐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이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이 되기도 했지만, 창덕궁에 국왕이 주로 머물렀던 조선후기에는 동궐 중 창경궁과 서궐인 경희궁 일대가 궁궐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이다. 궁궐에 머물렀던 사람들로는 국왕과 왕비, 세자와 가족들, 어린 왕자들, 많은 후궁들, 대비를 비롯한 선왕대의 후궁 등과 이들에 딸린 많은 궁녀와 왕을 호위하는 내시 등을 들 수 있으며, 대부분 이들은 창경궁에 거처했다고 할 수 있다. 대비의 거처로 주로 쓰였던 양화당 아래쪽에는 이 ..

궁궐_종묘 2012.09.16

[창경궁] 통명전(보물818호)과 양화당, 대비가 거처하던 창경궁의 중심 공간

창경궁은 원래 세종때 상왕인 태종이 거처하기 위해서 처음 조성되었으며, 그 후로는 왕실의 어른인 대비들을 위해서 성종대에 창건된 궁궐이다. 창경궁은 왕의 거처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비를 비롯하여 많은 후궁들과 그들의 소생을 비롯하여 주요 왕실 가족이 거처하던 공간이었다. 창경궁 안쪽 후원과 가까운 곳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통명전과 양화당은 창경궁의 핵심적인 건물로 통명전은 국왕이 거처하는 침전으로, 양화당은 대비가 거처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국왕은 대비의 거처 근처에서 머물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통명전은 대비의 거처인 양화당과 함께 대비가 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수렴청정 기간 등 대비의 위상이 높았을 때, 대왕대비가 존재했을 때, 또는 왕의 생모가 대비가 아닌 경우 등 여러 ..

궁궐_종묘 2012.09.14

[창경궁] 환경전과 경춘전, 국왕과 왕비가 거처했던 내전 건물

창경궁 정전인 명전전 뒷편으로는 국왕과 왕비를 비롯하여 왕실에 속해있던 많은 일가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창경궁은 세종대에 상왕인 태종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궁궐건물들이 조성된 이래로 성종대에 대비를 비롯한 왕실가족을 위해 창건한 궁궐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버린 이후 대부분의 기간동안 국왕이 거처했던 창덕궁은 실제로 정전, 편전, 동궁전을 제외하고는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지 않다. 실제로 대비를 비롯한 왕실 어른들, 많은 후궁들과 그들 소생인 어린 왕자와 공주들, 왕실에 일하던 상궁과 나인 등 왕실에 속한 사람들이 주로 거주했던 장소는 창경궁 일원이었다고 한다. 창경궁에는 이들을 위한 많은 전각들이 있었는데, 일제가 이곳에 동물원을 조성하면서 대부분의 전각들은 허물어지고, 환경전,통명전,경춘전 등..

궁궐_종묘 2012.09.14

[창경궁] 숭문당과 함인정, 국왕이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던 건물

숭문당은 법전인 명정전 뒷편에 임금이 거처하던 문정전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 이 숭문전이 그 역할을 하는 곳으로 건물의 크기는 크지 않지만 조용한 분위기로 학문과 국사를 논의 하기에 적당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국왕이 주로 거처하며 정사를 논의하던 곳은 창덕궁이며, 창경궁 정전과 편전은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편전의 부속건물이라 할 수 있는 숭문당은 창덕궁에서 성균관으로 가는 길에 있으며, 궁궐 후원과도 가까운 까닭에 창덕궁에 비해서 일상적인 업무에서 벗어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으로 국왕이 정치를 벗어나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기 좋은 분위기를 하고 있어 많이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조는 이곳에서 성균관 유생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함인정은 명정전..

궁궐_종묘 2012.09.13

[창경궁] 편전인 문정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

창경궁 명정전 뒷편에 위치한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임금이 정사를 보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편전은 법전 뒤에 나란히 위치하나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은 동향인 명정전과는 방향이 다른 남향을 하고 있다. 문정전은 창경궁이 건립된 성종대부터 존재했던 건물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던 휘녕전이 이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조성하면서 철거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980년대 창경궁 중창공사때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건물은 궁궐의 편전건물로 격식을 크게 강조하지 않고 있으며,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내부는 닫집이 있는 어좌를 중심으로 마루가 깔려 있는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국왕이 머무는 곳이라기 보다는 신하들과 국가의 중요..

궁궐_종묘 2012.09.11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 (국보226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전

창경궁의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되는 건물로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다른 궁의 법전이 남향인 것과 달리 동향이다. 임진왜란때 불탄 건물으로 광해군때 다시 지은 건물이다. 창경궁 자체가 대비가 거처하는 장소로서 유교법도에 따라 동향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에 비해 단층 지붕으로 규모는 약간 작다. 인조 반정을 포함하여 대비의 정치적인 위상이 높을 때 등에 많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창경궁 명정전은 창덕궁이나 경복궁의 정전과는 달리 단층 건물이지만, 국왕이 국가적인 행사를 주관하는 정전으로 2층의 월대를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놓고 있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1칸 규모로 팔작지뭉을 하고 있으며, 지붕을 받치는 보는 다포계 양식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

궁궐_종묘 2012.09.11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보물 385호), 품계석이 세워져 있는 정전 앞 마당

창경궁은 조선3대 국왕인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머물렀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궁궐로 상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태종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상왕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국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했던 대비들이 존재했다. 이런 까닭에 창경궁은 주로 왕실의 어른인 대비를 위한 공간의 성격이 강한 궁궐로 실제로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처음 지은 궁궐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실제로 많이 사용하지 않다가, 임진왜란때 경복궁과 함께 불타버린 후 창덕궁과 함께 중건되어 주로 사용되었으며, 동궐로 불리었다. 창경궁 일원은 대비를 비롯하여 왕실에 딸린 후궁, 어린왕자나 공주 등이 살았던 주거공간으로 조선후기 후..

궁궐_종묘 2012.09.10

창경궁 옥천교(보물 386호), 금천을 건너는 돌다리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첫번째로 보이는 장면은 금천을 지나는 옥천교와 정전인 명전전 출입문인 명정문,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의 답도, 명정문 사이로 보이는 조정과 명정전의 웅장한 모습일 것이다. 그 중 옥천교는 궁궐 앞을 흐르는 명당수인 금천을 건너는 돌다리로 보물 386호로 지정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금천은 국왕이 사는 궁궐과 바깥세상을 구분하는 상징적의 의미를 갖는 작은 개천으로 중국 자금성에서는 금수(禁水)라고 부르며, 조선에서는 금천(禁川)이라고 이라고 부른다. 창경궁 금천은 동궐의 후원에 있는 반도지, 춘당지 등을 거쳐서 창경궁 외조를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 내려간다. 보물 386호로 지정된 옥천교는 궁궐 입구 금천을 지나는 전형적 금천교의 형태로 2개의 아치를 놓고 그 위에 판석을 올려 ..

[창경궁] 홍화문(보물384호)과 외조(外朝)의 외행각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은 다른 궁궐 정문과는 달리 동쪽을 하고 있는 출입문이다. 보물 384호로 지정된 홍화문은 성종 15(1484)에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으로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일제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면서 정문으로도 사용했던 건물로 여러 차례 수리를 하고 단청을 입혔기때문에 옛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17세기초 목조건축 양식이 잘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궁궐 정문으로서는 작은 규모라 할 수 있는 3문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조선시대에는 양쪽에 한쌍의 십자각을 두었다고 한다. 위층은 마루를 깔고 나무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한다. 홍화문 바깥쪽에..

궁궐_종묘 2012.09.08

[서울 고려대 박물관] 동궐도 (국보249호),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 그림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식으로 그린 궁궐도로서 현재 고려대 박물관과 동아대에서 각각 1점씩 소장하고 있다. 이 동궐도는 1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두개의 동궐도 모두 같이 그려진 그림이라고 하며 원래는 천.지.인의 세벌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화첩을 모두펼쳐 연결하면 평행사선 구도에 의해 그려진 두 궁궐의 모습이 장대하게 전개된다. 창경궁과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으므로 '동궐'이라고 불렀다. 동궐도는 궁궐 건물뿐 아니라 담장, 계단, 연못 우물 등의 시설물과 자연을 실제의 모습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그림으로서의 가치도 높지만 창덕궁, 창경궁의 건물배치와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그림으로 궁궐 건축과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림에 있는 건물의 건물..

지역박물관 2010.11.16

서울 창경궁, 대비가 거처하던 궁궐

창경궁은 조선 세종때 태종이 거처하던 곳에서 유래하여 성종 때 대비들을 모시기 위해 본격적으로 조성된 궁궐이다. 그후 임진왜란때 경복궁, 창덕궁이 불타고 왕이 임시로 거처함에 따라 궁궐로서 본격적으로 기능을 했다고 한다. 주로 대비와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일제시대때 동물원, 식물원이 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창경궁은 대비가 거처하는 궁궐이라는 격식에 따라 궁궐중 유일하게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왕의 즉위식 등 행사도 많이 치렀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 창경궁 내부는 동물원, 식물원을 철거함에 따라 많은 공간이 공터와 같은 상태로 남아 있어 타 궁궐에 비해 넓어 보이기도 한다. ※ 창경궁 탐방 1. 흥화문과 옥천교 2. 명정문, 명정전 앞 마당, 품계석, 회랑 3. 창경궁의 법전인 명정전 4. 숭문당,..

궁궐_종묘 2010.09.06

서울 종묘(宗廟)에서 창경궁(昌慶宮)으로 가는 길

서울 종묘와 창경궁은 작은 육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육교 아래로는 율곡로가 지나가고 있는데 이 길은 양쪽으로 고궁 담벼락이 있고 오래된 가로수가 터널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을날 낙엽이 쌓인 이 길을 걸으면 가을의 정취를 가장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옛날에는 종묘와 창경궁, 창덕궁이 모두 연결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길은 매우 아름답지만 그래도 창경궁과 종묘의 숲이 연결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창경궁과 종묘를 가로지르는 율곡로입니다. 고궁의 돌담길 옆으로 낙엽이 쌓인 가을의 이 길은 가장 가을의 정취가 넘치는 길 중에 하나입니다. 종묘 영녕전에서 창경궁으로 가는 육교 앞에서 이 길을 돌아서 가면 정전의 전사청으로 연결되는 숲 길입니다. 종묘 영녕전에서 창경궁으로 가는..

한국의 풍경 201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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