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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터 3

북한산성 행궁터, 산성에 마련한 국왕의 임시 거처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임시로 머무는 별궁이다. 행궁은 전쟁 등 국가 비상상황시 왕이 잠시 피난할 때 머물거나 지방 순시나 휴양 등을 위해 지방관아에 설치한 임시 처소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행궁으로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서 조성한 강화행궁, 남한산성 광주행궁 등이 있고, 왕이 온천에서 휴양을 하기 위해 설치한 온양행궁과 이천행궁, 왕이 능묘에 참배를 하기 위한 화성행궁, 전주행궁 등이 있다. 행궁은 기본적으로 지방관아 기능을 유지하면서 국왕의 침소, 수행원을 숙소,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사무실용도 건물 등을 추가하여 일반적인 관아보다는 건물규모가 큰 편이다. 또한 강화행궁의 규장각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서나 서적 등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을 두기도 한다. 서울 북한산성내 동장대가 바라 보이는 상원봉 아래..

조선 관아 2013.05.08

남한산성 행궁터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주장성 건물터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격전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볼 수 있는 남한산성 성벽을 비롯한 방어시설들은 병자호란을 대비하여 쌓기 시작하여 그 이후에 크게 보강한 것이다. 남한산성은 한강이남을 지킬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서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방어하기 했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남한산성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문헌상의 기록이나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 투쟁에 들어간 시기이며 특히 문무왕 12년(672)은 당나라 병력 5만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신라를 침입하려는 의도를 보인 시기였다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당나라의 남하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주장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주장성은 당나라와의 전투에 대비하여 축조된 성으로 한강유역..

경주 성동동 전랑지(사적 88호), 통일신라시대 건물터가 남아 있는 곳

경주시 성동동 경주 중.고등학교 뒷편에 남아 있는 8천여평이 이르는 넓은 통일신라시대 건물터인 사적 88호로 지정된 경주 성동동 전랑지이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경주 도심 북쪽을 동.서로 흐르는 북천(알천) 제방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흙으로 쌓은 토단이 발견되어 일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약 2천여평 정도를 발굴하여 전당터 6곳, 복도로 보이는 장랑터 6곳, 담문터, 담장터 등이 발견되었고, 기와와 벽돌을 사용해서 만든 배수시설과 우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현재는 약 8천여평의 부지에 건물터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주춧돌만이 일부 남아 있다. 이곳 전랑지에 대한 전체적인 발굴작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배치 형식이나 구조 등으로 볼 때 사찰터는 아니고 귀족의 저택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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