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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감영 4

공주 포정사문루와 옛 충청감영터

충청감영은 충청도관찰사가 근무하던 곳으로 원래 청주에 있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부터 공주로 옮겼으며, 공산성을 비롯하여 여러 장소로 옮겼다가 숙종때인 1603년 이후부터 현 공주사대부속고등학교가 있는 자리에서 200년동안 있었다고 한다. 구한말 공주감영에는 49동 481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상당수 건물들이 없어지고, 충청관찰사가 근무하던 선화당과 구한말에 지어진 공주목 동헌, 그리고 정문인 포정사 문루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포정사문루는 조선시대 공주에 있었던 충청감영 정문이다. 아래층에는 큰 문을 달아서 감영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로, 2층은 누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까지 공주사대부고 정문으로 사용했던 것을 공주군청으로 옮겨졌다가 199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조선 관아 2011.04.14

공주목 동헌, 공주목사가 근무하던 건물

공주 웅진동 공주박물관 입구로 옮겨진 옛 조선시대 공주감영 건물 중 공주목사가 근무하던 동헌 건물이다. 조선시대 공주는 충청관찰사가 근무하던 감영이 있던 고을이며, 보통은 충청감사가 공주목사를 겸임했다고 한다. 공주목은 금강 중하류지역인 공주, 부여, 서천 등의 지역을 관장하고던 고을로 현재의 대전광역시 또한 공주목에 속해있었다고 한다. 공주는 금강수운, 한양과 호남지역 간 내륙 교통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로 일제강점기에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교통의 중심지가 대전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충남도청 소재기이기도 하였다. 공주목사가 근무하던 건물인 동헌은 동학농민전쟁 이후 일어난 갑오개혁 이후에 세워진 건물로 건물규모로 볼 때는 목사가 근무하던 동헌건물 중에는 작게 지은 건물..

조선 관아 2011.04.14

공주 충청감영 선화당, 충청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건물

조선시대 관찰사가 근무하던 감영은 관할지역내 모든 행정, 사법업무를 총괄하던 곳으로 주 건물인 선화당을 비롯하여 많은 부속건물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는 감영 건물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선화당은 관찰사가 근무하던 주 건물로 모든 감영에 선화당이라는 동일한 이름의 편액이 걸려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선화당 건물로는 대구, 원주, 공주와 북한 함경남도 함흥에 선화당 건물이 남아 있다. 전주의 선화당은 최근에 복원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주시 웅진동 공주박물관 입구에 복원된 충청관찰사가 근무하던 공주감영 선화당은 순조33년에 지어진 건물로 공주감영 옛터인 공주사대부고 교정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다른 곳으로 옮겨져 박물관 전시실로 사용하다가 1992년에 현재의 위치로 ..

조선 관아 2011.04.14

공주 우금치 전적지(사적 387호), 동학혁명 최대의 격전지

조선시대 호남지역에서 논산, 부여를 거쳐서 서울로 연결되는 육로가 금강변 충청감영이 있었던 공주 시내에 들어오기 직전에 있는 마지막 고개가 우금치로 동학농민전쟁 당시 최대의 격전지이다. 동학혁명당시 정부와 체결된 전주확약이 지켜지지 않자, 동학 농민군은 2차봉기를 일으키고 전봉군이 이끄는 4천명의 농민군은 논산에서 손병휘가 이끄는 북접군과 합류하여 2만여명의 군세로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로 진격했다. 호남지역에서 공주로 들어오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곳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렸으나 관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크게 패퇴하였다. 지금 우금치 전적지에는 당시를 기념하기 위년 기념탑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우금치 전투를 기념할만 것은 거의 찾아 보기 힘들다. 게다가 우금치전적기념..

근현대유적 201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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