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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박물관 32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보물 107호), 부여박물관 야외로 옮겨진 고려말에 세워진 탑비

부여군 성주산 보광서 절터에 남아 있던 것을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서 전시하고 있는 보물 107호로 지정된 부여 보광사지대보광선사비이다. 이 비는 고려시대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의 공적이 새겨져 있다. 고려말 공민왕때인 1358년에 세워진 것으로 바침돌과 머릿돌은 남아 있지 않고 공적이 새겨진 비몸만 남아 있다. 앞면은 비가 처음 세워질 때 새겨진 것이고, 뒷면은 영조대인 1750년에 추가하여 적은 놓은 것이다. 화려하고 섬세하게 만들어졌던 고려중기 이전의 탑비와는 달리 간략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부여박물관 정원에는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를 하여 충남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승들이 부도와 비석 부재를 옮겨서 전시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백제 멸망이후 오래된 고찰이 많지 않았던 까닭에 비석들이 많이 전시되..

부여 당유인원기공비 (보물 21호),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군 유인원의 공적비

부여박물관 정원에 전시되어 있는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록한 보물 21호로 지정된 당유인원기공비이다. 유인원은 당나군의 낭장으로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을 평정하였다고 한다. 이 비석은 원래 부소산에 세조각으로 깨어져 흩어져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복원해 두었다고 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비는 몸돌과 머리돌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머릿돌에는 당나라 전기의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여섯마리의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해 놓고 있다.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서 현재는 그 글씨를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며, 몸돌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가 있다. 이 비가 세워진 시기는 소정방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비문을 새지지 3년 후인 663..

[부여박물관] 부여 석조 (보물 194호), 관북리 왕궁터에서 발견된 백제 왕궁에서 사용했던 수조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흔히 사찰에서 샘물과 연결하여 물을 담아두는 석조가 오늘날까지 많이 남아 있다. 이는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곳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으로 불교의 전파와 함께 사원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석조는 단단한 화강석을 파서 만든 큰 구조물로 그 재료의 견고성 등으로 인해서 삼국시대 이후 만들어진 많은 석조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보물 1523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불국사 석조는 오늘날까지 불국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제공하고 있다. 부여박물관 중앙에는 백제의 마지막 왕궁터로..

[부여박물관] 야외 정원에 전시된 고려시대 석탑 外

부여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석조문화재 중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탑들이다.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으며,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공간이다. 탑은 석탑, 목탑, 전탑 등 여러가지 재료를 가지고 만들었으며 통일신라시대 감은사지와 고선사지 석탑을 만든 이후에는 2개의 탑을 사찰 중심공간에 배치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으며, 그 조각수법 또한 전성기를 이룬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석탑을 세우기 위한 부처님 사리의 희소성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앙의 중심이 탑에서 부처를 형상화한 불상을 모신 금당으로 바뀐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정형화되기 시작한 석탑은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그 중요성이 많이 떨어져서 그런지 조각수법이 빼어난 석탑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부여박물관] 충남지역의 석조불상

부여박물관 야외 정원에 전시된 충남지역의 석조불상들이다. 백제는 초기에 백제의 미소로 잘 알려진 서산마애석불을 비롯하여 태안마애석불 등을 만들기는 했지만, 사찰에 모시기 위한 석조불상은 그리 많이 만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불교를 도입한 초기에는 불상을 만들기는 했지만, 당시 불교 신앙의 중심을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중요시했기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도읍이었던 웅진과 사비성이 있었던 충남지역에는 백제시대의 석조불상보다는 고려시대 호족들이 만들었던 투박한 형태의 석조불상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많이 남아 있다. 논산 관촉사, 부여 대조사, 논산 개태사, 예산 삽교읍, 아산 평촌리, 부여 정림사지 등 많은 곳에 석조불상들이 남아 있는 곳이며, 그 중 관촉사나 대조사의 불상은 고려..

[부여박물관] 박만식 기증실, 충남 논산지역 출토 백제 토기

부여박물관 기증전시실로는 충남대 건축학과 교수를 지낸 박만식씨가 기증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만식기증실이 있다. 이 전시실에는 삼국시대 백제의 영역 중 부여와 가까운 지역인 논산시 연산면 일대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된 토기는 적갈색 연질토기도 있으나, 대부분 회청색 경질토기로서 단지, 목단지, 그릇받침, 굽다리접시, 손잡이잔, 세발토기, 뚜껑접시, 병, 작은단지, 토기뚜껑 등은 이 지역의 대표적 기종으로 꼽힌다. 경주박물관의 국은기념실에 비해서 전시유물이 다양하지 않고 연산지역에서 출토된 토기 위주의 단조로운 전시실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시실에 전시된 토기들은 논산 모촌리와 표정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충남 논산군 연산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이라고 한다. 논산 표정리고분군은..

지역박물관 2012.06.16

[부여박물관] 백제의 멸망과 의자왕, 후대 사람들이 본 백제와 부여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년)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재위 초기인 642년에는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40여성 빼앗는 등 신라에 큰 타격으로 주었다.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와 당나라의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는 등 내.외적으로 백제의 국력을 회복하는데 힘썼다.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사비성이 포위되자 웅진성으로 피신했다가 항복아여 태자와 함께 당나라에 압송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신라군이 육로로 김유신이 이끄는 5만명의 군대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의 오천결사대를 격파했으며, 당나라의 소정방과 신라의 김인문이 이끄는 연합군이 금강수로를 이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백제의..

지역박물관 2012.06.15

[부여박물관] 백제의 무늬 전돌 (보물 343호), 산경치.용.봉황.연꽃.구름.괴수 등 여덟가지 무늬의 전돌

무늬벽돌(塼)은 오늘날 벽돌이나 타일과 비슷한 용도로 사용하는 건축자재로 흙을 사각형, 직사각형, 마름모꼴 등의 형태로 바닥이나 벽면을 장식하는데 주로 사용했다. 무늬벽돌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 이후부터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고분이나 절터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바닥이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무늬벽돌에는 다양한 소재의 무늬들이 그려져 있는데 불교적인 소재인 연꽃이나 보상화무늬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무늬벽돌의 무늬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 무늬를 통해 당시의 회화 경향이나 문화의 전파 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부여 규암면 외리 절터에서 파편을 포함하여 모두 140여점 출토된 보물 343호로 지정된 백제의 무..

지역박물관 2012.06.14

[부여박물관] 백제 사비 시대의 불교 예술, 금동불상

중국 동진을 통해 백제체 불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침류왕때이지만, 실제로 불교가 크게 융성한 것은 백제 부흥을 꿈꾸던 성왕대로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제의 영향을 받아서 중국으로부터 기술자 등을 지원받아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기면서 정림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을 세웠다. 이런 경향은 그의 아들인 위덕왕과 무왕, 의자왕때까지 이어졌으며, 이런 경향은 일본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특히 백제의 불교는 예술과 외교적인 측면에서 많은 족적을 남겨 놓고 있는데 신라의 금동불상인 반가사유상, 일본의 반가사유상, 신라의 황룡사 목탑, 석가탑, 일본 나라의 동대사를 비롯한 많은 불교 건축에 백제의 영향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일본의 사찰건축 전문회사 또한 이 당시부터 존재했던 백제의 장인..

지역박물관 2012.06.13

[부여박물관] 신라와의 전쟁과 익산경영, 왕궁리유적지 출토 유물

전북 익산시 왕궁리에는 국보 289호로 지정된 왕궁리 5층석탑을 중심으로 옛 절터가 남아 있다. 이 절터를 발굴 조사한 결과 사찰건물터와 함께 궁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와 주변에 성벽터가 발견되어 이 곳이 백제 무왕이 미륵사 건립과 함께 백제 왕궁을 조성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해 주고 있다. 왕궁리 절터에는 무왕이 조성한 왕궁지와 후대의 사찰 유적이 같이 남아 있는데 후대의 궁궐과 마찬가지로 앞쪽에는 정전을 중심으로 한 의례적인 공간이, 뒷쪽으로는 생활공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절터에서는 중앙정부가 있는 곳이란 의미의 '수부'명 기와가 발견되어 이 곳이 왕궁으로 조성한 곳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한 관북리유적지 등에서 출토된 당시의 행정관제를 나타내는 글씨가 찍힌 기와들이 왕궁리유적지에서..

지역박물관 2012.06.11

[부여 박물관] 백제 중흥을 꿈꾼 서동요 주인공 백제 무왕

성왕이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래로 백제는 약 100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존재했었느데, 성왕, 위덕왕, 무왕, 의자왕 재위기간이 대부분으로 그 중 서동요 설화로 잘 알려진 무왕이 재위 기간 40여년으로 가장 길었다고 할 수 있다. 무왕대에는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며,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당나라와 교류하였다. 무왕대에는 신라 공격에 자주 군대를 동원하고 미륵사나 궁궐 남쪽 연못(궁남지)를 파는 토목공사를 많이 일으녀 국력이 많이 소모되어 백제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무왕과 관려된 유적으로는 삼국사기에 무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왕흥사가 있는데, 이 사찰은 최근에 출토된 왕흥사지 목탑지에서 출토된 청동사리함에 이 사찰이 위덕왕대에 577년에 세워졌다고 하며, 죽은 그의 아들을..

지역박물관 2012.06.08

[부여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 (국보287호), 백제를 대표하는 문화재

삼국시대 백제를 대표하는 화려한 유물인 국보 287호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이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대에 크게 유행한 박산향로의 일종으로 백제 마지막 왕들이 묻혀있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이 향로는 용이 머리를 들어 입으로 향로를 물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받침, 사실감 있게 묘사된 연잎으로 장식하고있는 향로 몸통, 중국 전설에 나오는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박산을 묘사한 몸체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뚜껑의 정상부에는 한마리의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향로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향로에서 피워 올린 연기가 박산 주위에서 안개처럼 퍼져나가는 모습을 연출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산형태의 뚜껑에는 12명의 인물과 42마리의 동물, 바위, 나무 등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어 중국의 영..

지역박물관 2012.06.06

[부여박물관] 능산리 절터 출토유물에서 보여지는 백제의 대외교류

백제는 성왕대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중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양나라 무제를 위한 대통사를 창건하였으며 유학에 정통한 학자와 장인,화가 등을 초빙하기도 하였으며, 불교경전 들을 얻어 오기도 했다.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능산리사지에는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나타내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중국 남조와 백제와의 교류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대 이후에도 이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능산리 절터에서는 수당의 영향을 받은 흑갈유 벼루나 자기편을 비롯하야 남조에서 많이 사용한 호자, 서역과 북위에서 많이 만들어진 소조상을 비롯하여 서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유리제품들도 출토되고 있다. 또한 능산리절터에서는 백제에서 사용된 항아리, 사발, 등잔,..

지역박물관 2012.06.05

[부여박물관] 백제 창왕명석조사리감 (국보 288호), 능산리사지 출토 금속공예품과 소조상

국보 288호로 지정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은 백제 마지막 왕들의 고분이 있는 능산리 절터 목탑지에서 출토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리감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창왕은 백제 27대 위덕왕을 일컫는 명칭이며, 그의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석으로 능산리사지 목탑지 심초석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리감에는 창왕의 여동생인 공주가 만들어 사리와 함께 봉안했다는 글씨가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풍의 글자로 적형 있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중요한 금석문 자료로,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게 적혀 있어 이 절의 창건연대와 이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의 제작연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또한 능산리절터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목탑이 있던 터에서는..

지역박물관 2012.06.05

[부여박물관] 능산리사지 목간에 남겨진 이야기

책(冊)이라는 한자의 어원이 되는 목간은 종이가 발견되기 이전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문서로 폭 1cm, 길이 20~30cm 정도로 끈어로 묶어서 사용했는데, 지금의 책과 비슷한 크기라고 할 수있다. 목간은 춘추전국시대 이후 다양한 저서들이 적혀있는 오늘날의 책과 같은 용도로도 많이 사용되었지만, 실제로는 교역을 위한 영수증, 물품표, 교역내용의 기록한 장부 등의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는 한.중.일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지역에서 교역의 목적으로 한자를 도입하고, 이를 목간에 기록해 놓은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목재로 만들어진 목간은 물품표 등이 경제적인 목적으로 종이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동안 사용되었는데, 목재의 특성으로 우리나라에서 잘 부패되지 않는 연못, ..

지역박물관 2012.06.03

[부여박물관] 능산리사지 가람이야기, 공방지 출토 유물들

부여군 능산리 고분과 부여 나성 사이에 위치한 능산리 절터는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로 원찰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이 사찰은 다른 사찰과는 달리 뒷편 강당과 주변 건물들이 사당으로 먼저 세워지고 그 뒤에 목탑과 금당이 지어지면서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능산리 사지 절터 뒷편에는 강당건물과 함께 공방지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있는데, 이 곳은 원래 성왕의 제사를 지내던 사당의 부속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절을 세운 위덕왕이 죽고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 기능이 축소되면서, 공방건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굴뚝을 설치하여 동광석을 제련하고 사찰에 필요한 각종 ..

지역박물관 2012.06.02

[부여박물관] 위덕왕과 능산리사지, 절터에서 출토된 유물

백제 마지막 왕들의 무덤이 있는 능산리고분과 백제 나성 사이에 위치한 능산리사지는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인 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된 절터이다. 백제는 사비성을 도읍으로 하던 시기에 많은 사찰들을 건립했지만 그 중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이다. 이 사찰은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 지어졌다는 의견되 있지만, 대체로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원 원찰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으로 보인다. 이 절은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전형적인 1탑 1금당의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여러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중국으로 부터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청자를 비롯하여, 문서에 해당하는 많은 목간들, 건축자..

지역박물관 2012.06.01

[부여박물관] 백제 성왕대의 대외교류, 남북조의 문물을 받아 왜倭에 전하다.

고대국가 이래로 한.중.일 해상무역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한반도 서남부 해안을 장악하고 있던 백제는 삼한시대로 이래로 꾸준한 대외교류를 통해서 동아시아에서 국제적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백제는 중국의 남조, 왜와 상당한 수준의 교류관계를 가조고 있었으며, 그 중간에 위치한 가야지역과도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북쪽의 고구려, 동쪽의 신라와는 대체로 적대적 또는 비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신라와의 한가유역 쟁탈전에서 실패한 이후 수도를 사비로 옮기면서 중국,왜와의 관계는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부여로 수도를 옮긴 성왕은 중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남조의 양나로부터 많은 제도와 문물을 받아 들였으..

지역박물관 2012.05.31

[부여박물관] 정림사지 출토유물, 성왕대 이후 백제의 의관제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유물인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 정림사지는 도성의 중심지에 위치한 사찰로 경주 황룡사와 비슷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찰이 건립된 시기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기던 시기로 성왕이 중국 남조 양나라의 지원을 받아서 도성, 궁궐 등과 함께 도시의 기능을 갖추기 위해서 제일 먼저 세운 공공시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정림사의 위치는 백제 궁궐인 사비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부여읍 구아리 도심에서 정남방향으로 약 2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로 도로도 남북으로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나 당나라때 존재했던 투루판의 교하고성이나 고창고성에서도 큰 절이 도심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 주변으로 광장과 상업지역이 ..

지역박물관 2012.05.30

[부여박물관] 백제 성왕대 통치체제, 왕궁과 관아

백제의 통치제제로 백제가 건국하여 고대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에 있었던 부족적 성격이 강한 오부제가 있었다. 백제의 중심부족은 중부가 되고 나머지 방위에 독자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집단에게 독자성을 인정하고 관직을 부여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흔히 말하는 백제의 오부제는 '수도오부제'로 한성백제시절부터 있었으나 성왕이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후 본격적으로 적용되었던 제도이다. 오부는 수도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의 오부로 나누고 각부를 다시 오항으로 나누어 거주하게 하고, 달솔이라는 부의 책임자를 두어 군사를 거느리게 하는 제도로 백제 지배계층인 귀족들을 수도에 거주하게 하고 이들을 통제하기 좋게 하기 위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백제의 통치제도를 보여주는 유물들은 백제의 마지막 도성의 사비성내..

지역박물관 201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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