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반응형

운현궁 7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내부에 전시된 당시 생활상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거처했던 운현궁은 이름은 궁궐이지만, 당시의 세도가의 주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인 노안당에는 흥선대원군과 그를 위해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 그리고 대원군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으며, 안채로 사용되었던 노락당에는 명성황후가 왕비수업을 받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운현궁 사랑채인 노안당에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노안당 대청마루에는 흥선대원군이 난을 그리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난을 그리고 있는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친척인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웠고, 묵란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추사는 그의 묵란을 가리켜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궁궐_종묘 2011.12.06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여인들의 공간인 안채 이로당(二老堂)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곳으로 현재의 건물들은 고종이 즉위한 이후에 새로이 지은 건물이다. 운현궁은 사랑채인 노안당, 명성왕후가 왕비수업을 받았던 노락당, 안채인 이로당, 별당인 아재당, 정자인 영화루, 은신군.남연군의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언덕에 있던 별당.사당.정자 등은 일제가 허물고 양관이라는 현대식 건물을 지었다. 이로당(二老堂)은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거처했던 운현궁에서 제일 안쪽에 위치한 건물로 운현궁에서 안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원래는 노락당이 안채였으나 그 곳에서 고종의 가례의식을 치러 안채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새로 신축한 건물이라고 한다.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7칸으로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중정이 있는 'ㅁ'자형 건물배치..

궁궐_종묘 2011.12.05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 명성황후가 왕비수업을 받던 노락당(老樂堂)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전에 살았던 곳으로 구한말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즉위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사랑채인 노안당, 원래 안채였다가 명성왕후가 신부수업을 받은 이후 비워두었던 노락당, 안채인 이로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뒷편 언덕 후원에는 별채와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일제가 이를 허물고 양관이라는 현대식 건물을 지어놓고 있다.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인 노락당(老樂堂)이다. 정면 10칸이나되는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로 구한말에 지어진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락당은 원래 운현궁의 안채였으나,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왕비수업을 받았던 까닭에 안채는 노락당 뒷편에 이로당을 신축해서 옮겨지고 이곳 노락당은 회갑연 등 흥선대원군 일가의 가..

궁궐_종묘 2011.12.04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노안당(老安堂), 구한말 정치의 중심 사랑방

운현궁 사랑채인 노안당으로 대원군이 직접 이름을 짓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현판을 달고 있는 건물이다. 이 곳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일상에 거처한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노자를 안지'하며 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노안당 건물은 구한말 당시에 유행했던 사랑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기거했던 건물임에도 일반 한옥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으며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우리나라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각목..

궁궐_종묘 2011.11.29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솟을대문과 수직사

구한말 역사와 정치의 중심지였던 흥선대원군의 거처였던 운현궁이다. 이름은 운현궁이지만 궁궐 건물은 아니고 민간인들이 사는 사가(私家)에 이름만 궁(宮)이라고 붙혔다. 구한말 고종이 등극하기 전에는 이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아마도 계속 확장 한 것으로 보인다. 운현궁 출입문인 솟을대문을 통해서 들어서면, 정면에 대원군이 거처했던 사랑채인 노안당을 들어가는 출입문이 보이고 오른쪽편에 운현궁에 소속돤 관리들이 거처했던 수직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 궁에서 파견된 경관들과 관리하는 인원이 많았다고 한다. 솟을대문 북쪽으로는 물품을..

궁궐_종묘 2011.11.27

서울 운현궁 양관, 일제가 흥선대원군 손자 이준용에 지어준 서양식 저택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운현궁 양관은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저택으로 일제가 한일합방 이전인 1907년도에 지어준 건물이라한다. 원래 이 곳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의 뒤뜰에 해당하는 곳으로 별당격인 아재당과 정자인 영화루, 은신군.남연군의 사당이 있었던 자리로 이들 건물들을 헐고 일제가 한일합병에 앞서 왕실인사를 회유하기 위해서 만들어 준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그후 의친왕의 차남이 이우의 소유가 되었다가 해방후인 1946년부터 덕성학원에서 소유하게 되어 현재는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의 건축양식은 한국은행, 총독부청사 등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건축했던 많은 현대식 건축물들과 비슷하게 바로크 건축양식을 모방해서 만든 건물로 외형적으로 화려하면서 곡선이나 타원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의 건..

구한말 역사의 현장, 흥선대원군 사저 운현궁

구한말 역사와 정치의 중심지였던 흥선대원군의 거처였던 운현궁입니다. 이름은 운현궁이지만 궁궐 건물은 아니고 민간인들이 사는 사가(私家)에 이름만 궁(宮)이라고 붙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한말 고종이 등극하기 전에는 이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아마도 계속 확장을 했던 것 같습니다. 입구는 권세가의 상징인 솟을대문을 통해서 들어가며, 솟을대문을 들어서며 정면에 대원군이 거처했던 사랑채인 노안당을 들어가는 출입문이 보이고 오른쪽편에 운현궁에 소속돤 관리들이 거처했던 수직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직사 앞으로는 원래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넓은 마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운현궁에 소속된 관리들이 거처했던 수직사 건물입니다. 구한말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의 권세가 막강해서 상당히..

궁궐_종묘 2010.09.03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