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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 28

[중국 취푸(曲阜)] 곡부명고성(曲阜明古城, Qufu Minggucheng), 명나라때 쌓은 읍성

취푸시(曲阜, Qufu)는 중국 산동서에 위치한 도시로 전국시대 사상가 공자(孔子)가 탄생하고 학문을 가르쳤던 고장이다. 취푸는 주나라 무왕의 동생인 주공단(周公旦)이 건국한 제후국 노국(魯國)의 도읍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취푸시는 중국내에서 가장 중요한 공자 유적지로 1994년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공자후손들의 저택이자 관아건물인 공부(公府), 공자와 후손들의 무덤인 공림(空林)을 비롯하여 많은 유적지들이 도시내에 산재해 있다. 취푸시는 공자유적지로 역대왕조의 후원을 받아 왔으며, 송나라 이후 공자의 장손은 연성공(衍圣公) 지위를 부여받았다. 연성공은 공자의 사당과 묘역을 관리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역할과 함께 세금을 걷고 곡부지역을 다스리는 제후의 지위였다. 취푸시는 ..

중국(China) 2014.08.27

[서울성곽] 낙산성곽, 한양도성 좌청룡에 해당되는 낙산 능선을 따라 쌓은 성벽

한양도성을 이루는 동.서.남.북 4곳의 봉우리 중 가장 낮은 해발 125m의 낙산은 도성 서쪽에 위치해 있어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낙산 북쪽에는 동소문에 해당하는 혜화문이 있고, 남쪽에는 동대문에 해당하는 흥인지문이 있다. 흥인지문은 한양의 물이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출구에 해당되며, 광나루를 비롯한 한양에서 한반도 동쪽 내륙지방으로 연결되는 대부분의 교통로와 연결되며, 혜화문은 미아리고개를 넘어 원산, 함흥을 비롯한 한반도 동북지역으로 연결되는 대부분의 교통로가 출발하는 지점이다. 낙산은 산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졌으며 원래는 숲으로 우거지고, 크고 작은 바위와 약수터가 많아 안평대군의 별장인 석양루를 비롯하여 많은 정자들이 세워졌던 곳으로 한양의 5대 명소로 공원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의 낙산..

안산 안산읍성 및 관아 건물터

경기도 서해안에 위치한 안산은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장아구현이 설치된 이래 여러차례 그 명칭과 지위가 바뀌었는데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던 고려말 해안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안산군으로 승격된 이래 그 지위가 유지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개편으로 시흥,과천과 함께 시흥군으로 통합되었다가 이지역에 반월공단이 세워지면서 도시화되어 1986년 안산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인구 70만이 넘는 대도시로 인천과 함께 수도권의 대표적인 공업도시이다. 오늘날 안산은 서해안 갯벌을 간척하여 대규모 공단이 들어선 도시로 시화호가 있는 해안 주변에 도심이 형성되어 있지만, 조선시대 안산군 읍치는 도심 동북쪽 군포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수리산 서쪽편 자락에 위치한 수암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국..

진주 진주성(사적118호), 내성 동문인 촉석문과 동쪽 성벽

진주시 남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사적 118호로 지정된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의 현장이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던 곳이다. 진주성은 백제가 쌓은 거열성이 있었던 곳으로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공민왕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석축성을 쌓았다고 한다. 진주성은 서울의 풍납토성, 행주산성,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 등과 마찬가지로 강을 끼고 있는 평지에 나지막한 동산에 위치하고 전형적인 백제 읍성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성곽이다. 지금은 둘레 1.7km 규모의 외성만 남아 있지만 동쪽으로 외성이 있어 전체 규모는 둘레 4km 정도의 읍성이었다고 한다. 진주성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과 북쪽으로는 하천이 흘러서 해자 역할을 했..

서울 풍납동토성 (사적11호, 풍납토성), 마을이 형성되었던 북쪽편 성벽

서울 풍납동토성(일명 '풍납토성')은 몽촌토성과 함께 백제가 터를 잡고 국가를 세운 하남 위례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이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2.7km에 이르는 읍성으로 삼국시대 초기 읍성국가의 성(城)으로는 상당히 큰 규모로 남쪽편 몽촌토성과 함께 당시로서는 큰 규모의 도시였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건국한 이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압박을 받아 웅진(공주)로 천도했던 5세기말까지 500연 가까운 세월동안 백제의 수도로 한강변을 끼고 있어 많은 배들이 정박했던 물류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이다. 성벽은 한강변 늪지와 평지였던 곳에 인위적으로 흙을 다져서 성벽을 쌓은 판축식토성으로 전형적인 백제 토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은 폭 40m, 높이 11m에 이르며, 당시로서는 대규모 토목공사..

[서울성곽] 장충동에서 남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성벽길

인왕산 성벽과 함께 조선태조때 처음 쌓은 한양도성 18 km 구간 중 그 보존상태가 양호한 남산 동쪽편 능선을 따라서 쌓은 성곽이다. 남산순환도로 건설로 일부 구간이 끊어져 있기는 하지만 서울 도심 녹지 공간으로 그 보존상태가 양호한 남산 동쪽편 경사진 지형에 위치하고 있었기때문에 성곽이 허물어지지 않고 원형을 잘 보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숙종대에 한양 도성을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증측을 하였던 성곽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한양도성과 수원화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성이나 읍성은 성문주위나 평지를 제외하고는 조총의 공격에 대비한 여장을 설치않았던데 비해 한양도성은 평지에서 남산 정상부까지 성벽에 여장을 설치하고 있다. 남산 동쪽 성벽 탐방은 장충동 신라호텔 뒷편을 따라서 이..

대구 달성 (사적 62호), 원삼국시대 대구지역 토착세력이 쌓은 토축성

대구시 중심부에 위치한 달성공원은 작은 동물원이 있고, 조선시대 경상감영 출입문이었던 관풍루가 있는 대구의 오래된 도심공원이다. 달성공원은 원래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읍성 바깥쪽에 있던 오래된 토성으로 조선초기에는 달성내에 감영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곳엔 고려시대에는 달성서씨가 살던 사유지였으나 전국적으로 국방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읍성을 쌓던 세종대에 국가소유로 바뀌어 읍성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대도시에 공원이 처음 세워지기 시작했던 1905년에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1967년에 오늘과 같은 모습의 현대식 공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구 달성은 대구시민이 많이 찾는 유서깊은 도심공원이지만,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된 곳 중 하나이다. 이곳은 원삼국시대 대구지역 지방세력..

순천 낙안읍성, 정문격인 남문 쌍청루와 주변 성벽

낙안읍성은 전남 순천에 위치한 읍성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보존된 읍성으로 현재도 주민이 실제 거주하고 있는 유일한 읍성이다. 낙안읍성은 동남.북서 방향의 대로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관아 건물인 객사, 동헌 등이 자리잡고 남쪽에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초가집으로 배치되어 있다. 또한 물이 빠져 나가는 남쪽편에는 비상시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연못을 조성해 놓고 있다. 낙안읍성에는 동.서.남 3개의 성문을 두고 있는데 그 중 남문이 낙안들판의 여러 마을들 주민들이 읍성을 출입하는 정문으로 보인다. 남문에서 관아까지 연결되는 길 주변에 크지는 않지만 상업지구라 할 수 있는 저자거리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낙안읍성 남문은 옹성을 두고 있는 개거식 성문으로 성벽사이에 누각을 세워놓고 있는 형태이다. 남문 문루..

순천 낙안읍성, 서문과 관아 주변 성벽

순천 낙안읍성으로 조선초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남해안과 서해안 지방에 쌓은 많은 읍성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읍성이다. 읍성은 동남.북서 방향 대로를 축으로 남쪽에는 민가, 북쪽에는 관아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낙안읍성에는 동남 방향에 동문, 남서방향에 남문, 북서방향에 동문이 있고, 관아 뒷편 북동방향으로는 성문을 두고 있지 않다. 성벽은 상당히 큰 돌을 다듬어 석축을 쌓고 있는데, 안쪽에 토축을 쌓고 바깥쪽에 석축을 쌓는 일반적인 조선시대 읍성과는 달리 전체를 석축으로 쌓은 석성이다. 낙안읍성 서문은 북동쪽의 조계산과 이어지고 교통로와 연결되고 있으며, 조계산의 선암사, 송광사를 지나 승주, 구례, 곡성, 남원과 연결된다. 성문이 문루가 남아 있는 남문, 동문과는 달리 서문에는 문루가..

순천 낙안읍성, 동문인 낙풍루와 주변 성벽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소재한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이 지역에 있었던 낙안군 관아가 있던 곳으로 남해안 지역에서는 꽤 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는 낙안들판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순천과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승주, 구례를 거쳐서 남원과, 서쪽으로는 보성지역과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고려말, 조선초에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지역으로 해안에서 비교적 안전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 읍성을 쌓아 대비했던 곳이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읍성들 가운데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곳으로 평지에 장방형의 석축성을 쌓고 있다. 낙안읍성에 있는 동.서.남 3개의 성문 가운데 지금은 정문처럼 사용하고 있는 동문은 실제로 남해안이 있는 벌교지역과 연결되는 곳으로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경로이기도 하다. ..

순천 낙안읍성 옥사(감옥)와 연못

순천 낙안읍성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관청이 있던 지방고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남부 해안가지역이기 때문에 평지에 읍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는데, 동.서을 가르는 도로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관청 건물들이 있고 남쪽에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객사를 제외한 읍성내 관청 건물들은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관청의 배치나 구성요소들을 잘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낙안읍성의 옥사는 고을내의 죄수들을 수용하였던 건물로 다른 읍성과 다른 점은 관아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읍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남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큰 길은 관아로 연결되며 동쪽편에는 비상시 읍성내 식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조성한 연못들이 있고, 연못안쪽에 옥사터가 있었다. 옛 옥사..

조선 관아 2012.10.21

김해읍성 공진문, 김해읍성 옛터에 남은 유일한 성문

김해는 낙동강 하구 김해평야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옛 금관가야의 도읍지이다. 삼국시대에는 금관소경이 설치되었다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대체로 종3품 부사가 수령인 김해도호부가 설치된 지역이다.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역사적 배경과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의 본향인 까닭에 가야와 관련된 유적들은 많이 남아 있지만, 조선시대 유적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현재 김해는 김해향교와 김해관아 객사 후원, 최근 복원된 김해읍성 북문이 남아 있다. 김해읍성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우리나라 남서해안에 출몰했던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쌓았던 읍성 중 하나로, 김해의 지리적 위치가 일본과 가까운 까닭에 상당히 견고하게 쌓았던 읍성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16년에 석성으로 축조된 김해읍성은 둘레 4,4..

[이탈리아여행] 피사(Pisa)의 르네상스 시대 읍성 성곽과 성문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지중해 바닷가에 위치한 피사(Pisa)는 고대 로마시대 해군기지였던 곳으로 아르노강을 끼고 있어서 이탈리아 중부지방에서 교역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중세에서 르네상스시대까지는 상업으로 크게 번성했던 곳이다. 중세에는 피사인들이 제노바인들과 함께 이탈리아 서쪽에 있는 사르데냐 섬에서 이슬람세력을 몰아냈으며, 시칠리아섬의 팔레르노 섬을 약탈하여 모스크 기둥들을 가져와 피사대성당을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십자군원정에 참여하여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의 번영했던 모습이 피사의 사탑, 대성당, 세례당의 유적으로 남아 있다. 피사는 상업의 중심지로 피렌체, 제노바 등과 경재했으나 15세기 이후에는 아르노강에 토사가 쌓여 배가 운항할 수 없게되자 교역의 중심지로서 그 ..

이탈리아(Italy) 2012.03.10

강화 교동읍성, 삼도수군통어영 겸 교동도호부 관아가 있던 읍성

교동도는 강화도 서쪽에 주산인 화개산을 중심으로 여러 섬들을 연결하여 넓은 간척지로 이루어진 섬이다. 북쪽으로는 북녁땅인 연백평야와 마주 보고 있으며, 한강이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한강조운과 군사적인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삼국시대와 고구려때에는 고목군현이라 불렀으며, 광개토대왕이 이 곳 교동도에 화개산성을 쌓고 한성백제를 압박했었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때 교동현이 설치되었으며, 병자호란으로 청의 압박이 심했던 인조때 남양에 있던 경기 수영을 교동도로 옮기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와함께 경기.충청.황해도 삼도의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통어사가 설치되면서 교동도호부 부사가 이를 겸직했다고 한다. 삼도 통어사는 관직으로 경기도 수군절도사가 겸임하였다. 교동읍성은 1629년 교동도..

경주읍성 (사적 96호), 고려시대 경주 도심에 쌓은 읍성

경주읍성은 경주도심부에 있는 석축성으로 축조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려 우왕때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축성된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1012년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읍성은 임진왜란때 파과된 것을 중수했다고 하며 동문인 향일문, 서문인 망미문, 남문이 징례문 북문인 공진문이 있었다고 한다. 남문인 징례문 문루에는 성덕대왕 신종을 걸어놓고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경주의 다른 건축물등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축성에 사용한 돌 중 상당수가 인근 절터 등지에서 가져온 건축자재나 석탑 등의 부자재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읍성 석축 대부분이 헐리고 동쪽편 약 50m의 성벽과 치가 남아 있다. 신라천년 고도인 경주는 통일신라가 멸망한 고려, 조선시..

울주 언양읍성(사적 153호), 평지에 네모꼴로 쌓은 평지성

언양읍은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속한 읍소재지로 고려, 조선시대에는 울산에 설치된 울산도호부와 여러차례 분리되었다가 통합되기도 하였다. 대체로 100~200m의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있으며, 남북으로는 양산과 경주가 연결되는 교톨로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가지산을 넘어 밀양과 동쪽으로는 울산과 연결되는 교통상 주요 길목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삼국시대 이래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고을이다. 지금도 경부고속도로가 이 곳을 지나가고 있으며, 울산방향 분기점 또한 언양에 위치하고 있다. 선사 유적지인 울주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이 언양읍에서 약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언양읍성은 조선초기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쌓았던 전국의 읍성 중 하나로 처음에 흙으로 싸았던 것을 150..

보령 남포읍성, 고려말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읍성

보령시 남쪽 지역인 남포면 일대에는 조선시대에 남포현이 있어던 지역이다. 금강하구 서해안에서 서울 방향의 육로와 서해안 뱃길이 지나가던 이 고장은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곳으로 충청수영이 설치된 오천과 보령읍성, 서산의 해미, 홍성의 결성 등과 함께 서해를 통해 침입하던 왜구에 대처하기 위헤 읍성을 쌓았던 고장 중 하나이다. 남포읍성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쌓았던 전형적인 읍성의 모습을 하고 있어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도시화에 소외되었던 까닭에 읍성의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포읍성에는 주로 관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읍성은 둘레 900m 정도로 그리 넓다고는 볼 수 없지만 높이 3.6m의 석축성으로 상당히 견고하게 쌓은 읍성이다. 동.서.남쪽에 성문을 두고 북쪽편에 관아인 ..

보령읍성 성곽과 관아문

충남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는 주포면 소재지이자 조선시대 보령현 관아가 있었던 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 현재의 보령시는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개편으로 보령,남포,오천군이 합쳐져서 만들어졌으며, 군청이 대천해수욕장과 대천항에 가까운 대천지역으로 1914년에 이전하면서 행정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잃고 작은 면소재지로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보령현 관아가 있던 자리에 있는 보령읍성 성곽의 일부와 남문 문루인 해산문, 보령향교가 이 곳이 옛 보령현의 중심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옛 보령현 관아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주포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며, 이 학교 담장과 출입문 역할을 했던 읍성 성곽의 일부와 남문 문루인 해산루가 남아 있다. 보령 읍성은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처음 쌓았던 것으로 보이며, 태종때부터..

제천 청풍 팔영루, 옛 청풍도호부 문루

남한강 충주호에 수몰된 옛 청풍도호부 읍성 성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청풍 팔영루이다. 청풍도호부는 부사가 고을 수령인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규모가 컸던 고을이다. 청풍도호부는 충주, 단양과 함께 남한강 내륙수운의 중심지이자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주요 교통로인 죽령고갯길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로 삼국시대 이래로 크게 번성하였던 고장으로 여겨진다. 충주와 함께 경부선 철도의 교통으로 크게 쇠락했다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는 비운의 고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청풍 팔영루는 옛 청풍도호부 읍성 성문으로 보이는 문루이다. 팔영루를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초기 전국적으로 읍성을 구축할 때 처음 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팔영루는 2.2m 기단에 크지 않은 4각형의 출입문을 만들고 그 위에 문루를 올려놓고..

충남 홍성 홍주성, 구한말에 증축한 조선시대 읍성

충남 홍성의 군청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성은 구한말인 고종때 홍주목사 한응필이 크게 보수한 읍성으로 조선이 쌓은 마지막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곳 홍주성 성곽은 최초의 축성연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구한말 일본에 대항한 큰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의 전투결과 및 일본인들로 인해 많은 훼손이 있기는 했지만 성곽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홍주성은 둘레 1,772m에 달하는 읍성으로 원래는 사대문을 두고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인 조양문만이 남아 있다. 성내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관아건물이 35동이나 있었으나, 홍주아문과 동헌인 안회당 정도만 남아 있다. 구한말에 증축한 홍주성은 조선시대 축성기술이 동원된 마지막 성곽으로 성곽을 쌓은 규모로 보았을 때 상당히 정성을 들여서 쌓았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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