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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남해 충렬사 - 이순신 장군 가묘가 있는 곳에 세워진 사당

younghwan 2010. 2. 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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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충렬사는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이자 이충무공이 전사하신 노량해전의 현장인 남해섬과 하동사이의 노량해협을 바라보이는 나즈막한 동산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충렬사가 있는 자리는 이충무공이 잠시 가묘를 썼던 자리에 지역민들이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서 비석을 세우고 국가에서 성역화 시켰던 곳입니다. 고종때 서원 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일제시대 때 개인이 사비로 새로 건립한 사당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남해대교와 노량해협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이충무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임진왜란 마지막 격전장이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신 노량해협 바다가 보이는 나지막한 동산에 이충무공의 사당인 남해 충렬사와 이충무공 가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충무공 사당인 남해 충렬사를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충렬사 주변에는 옛날부터 나무를 많이 심어서 수목이 우거져 있습니다.


입구 우측편에 자리잡고 있는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로 생각되는 청해루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충렬사 입구에서 보이는 노량해협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유명한 남해대교가 이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충렬사의 정문격인 외삼문입니다. 오래된 전통이 있는 사당인지 고풍스러운 멋이 있습니다.


충렬사 외삼문을 들어서면 우측편에 내삼문이 있고 계단올라서 사당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남해 노량해협과 남해대교의 모습입니다.


사당이 있는 마당에서 본 내삼문입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충렬사 내력이 적힌 비석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명조선국삼도통제사 증시충무이공 묘비"는 1660년에 숭록대부 의정부 우찬성 송시열이 글을 짓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남해 충렬사를 있게한 남해사람 김여빈과 이정건이 사당 앞에 세운 '충민공비'입니다.


이충무공을 모신 사당입니다. 원래의 현판은 현종때 국왕이 직접 써서 하사했다고 합니다만 지금의 사당은 고종때 서원 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일제시대때 개인이 사비를 털어 새로 건립한 사당이라고 합니다.


사당 뒷편에는 충무공 사후 잠시 묻혔던 이충무공 가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내표지판


남해대교를 건너서 육지에서 바라본 남해 충렬사가 있는 노량의 풍경입니다.



충렬사는 노량해전의 치열했던 전투가 떠오르고, 노량 앞바다의 푸른 물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노량마을 해안 언덕배기 울창한 숲 속에 자리잡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 충무공은 관음포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아산으로 운구를 옮기기 전에 3개월간 이곳에 안치했다. 충무공의 순국을 슬프게 느끼던 남해사람 김여빈과 이정건이 사당 앞에 충민공비를 세웠다. 이순신장군이 순국한지 45년 후인 1643년에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58년. 어사 민정중이 통제사 정익에게 사당을 신축하도록 해서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사당 앞에 있는 "유명조선국삼도통제사 증시충무이공 묘비"는 1660년에 숭록대부 의정부 우찬성 송시열이 글을 짓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쓴 것이다. 현종 때에는 임금이 직접 쓴 충렬사 현판이 하사되었다. 이렇게 조정에서는 이곳 남해 충렬사를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인정하였고 세월은 흘러 순국 195년이 지난 후인 1793년에 이곳에 충무공비를 세우고 충민공비를 땅속에 묻었다. 충무공은 이 해에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남해 충렬사는 그 뒤에도 계속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었으나 고종8년인 1871년에 향사,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당은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922년에 윤기섭과 고준홍이 자기집 재산으로 사우3칸을 새로 지어 제사를 지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남해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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