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반응형

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반응형

 용인시와 남쪽 안성시, 평택시와 경계가 되는 지점에 위치한 남사저수지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처인성입니다. 전체 둘레 425m의 작은 평지성으로 성벽은 토성으로 쌓았으면 별로 높지도 않고 견고해 보이지도 않은 성입니다. 이 곳이 몽골의 고려 침입시 가장 유명한 전투인 처인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고려시대 명장 김윤후가 몽골 자군 살리타이를 사살함으로써 당시 세계 최고의 군대인 몽골 기마대를 물리친 곳입니다. 처인성의 전략적 위치는 용인 이남에서 서울방향과 연결해 주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중요해 보이기는 하지만 성벽의 규모로 보아 큰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만 역사적으로 고려가 몽골군을 격퇴한 장소로서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처인성은 용인 남사에서 서울 방향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교통 요지에 자리잡고 있는 토성입니다. 성곽을 쌓은 형태가 백제 토성과 비슷하다고 하여 백제 때 축성되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 곳입니다.

용인 처인성은 규모도 크지 않고 성벽의 높이도 별로 높지 않아서 지금의 모습으로 보아서 어떻게 강력한 몽골 기마대를 물리쳤을까하는 의문을 갖게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몽골 장수 살리타가 너무 방심하다가 이 곳에서 전사하게 되어서 몽골군이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것으로 생각되어 물러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강화도가 점령되지 않은 상태에서 용인 이남으로 남하하게 되면 원정군의 입장으로 매우 힘든 전쟁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용인 처인성 입구에는 근래에 세운 승전 기념비가 있습니다. 처인성은 별도로 성문이나 오르는 길이 남아 있지 않고 야산 언덕을 오르듯이 걸어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용인 처인성의 성벽입니다. 토성이라서 경사가 일정한 언덕처럼 보이지만 인공적으로 쌓은 성곽입니다. 성곽의 높이가 별로 높지도 않은데 몽고가 이 곳 처인성을 쉽게 점령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낳고 있습니다.

용인 처인성 성벽 위로 난 길입니다. 전체 둘레는 425m 정도로 크지 성 자체 규모는 크지 않은 곳입니다.

처인성 내부입니다. 지형에 따라 2~3단계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금은 내부에 나무들이 자라서 작은 동산처럼 보이는 황량한 곳입니다.

처인성은 북쪽에 있는 유일한 출입구로서 성문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입니다.

처인성에서 내려다 본 주위 풍경입니다. 넓지는 않은 들판에 논밭이 있고 이 길이 남쪽 안성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많지 않은 길 중에 하나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처인성(處仁城)은 경기도 기념물 제44호로써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43번지에 위치해 있다. 총면적 5,820평의 장방형으로 된 토성으로 본래 고려 때 군창(軍倉)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백제 때 축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성곽 둘레는 425m 이며, 북벽 좌측에 출입구가 있고, 남쪽 중간 지점에 후문자리가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입구 주변의 4백 평쯤 되는 부분에는 낮은 둔석이 있다. 내부는 지형에 따라 2~3단계의 층급이 있다. 현재 성곽의 흔적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토축된 주위는 3리였으나 이미 성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였고, 다만 군창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당시 이 지방은 교통이 발달한 곳이어서 일찍부터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처인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적을 기록하고 있다. 즉 고려 고종 19년(1232) 9월 몽골군의 2차 침공 때 승장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승리로 이끈 대몽항쟁의 전승지로 유명하다. <출처: 위키백과>

김윤후는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에 있었고, 몽골 침입 때 몽골 장군 살리타이(한자: 撒禮塔)를 처인성(處仁城 : 용인)에서 죽였는데, 그 공으로 임금이 상장군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뒤에 섭랑장(攝郞將)을 거쳐 충주 산성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있을 때 몽골군이 성을 포위하고 70여 일을 공격하였으나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성을 사수하고 이를 격퇴시켰다. 그 공으로 감문위(監門衛) 상장군이 되고 기타 공 있는 자는 관노·백정에 이르기까지 상을 받았다. 뒤에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때 동북면은 이미 몽골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않았다. 원종 때에는 추밀원 부사를 거쳐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가 되었다. <출처:위키백과>


반응형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에바흐 2011.08.01 16: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껏해야 수백명 들어가는 성으로 몽골군을 격퇴했다기 보다
    김윤후가 정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하는 식으로 적장을 사살하면서
    기사회생한 케이스랄까...^^;;

    살리타이를 비롯해서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남송을 공략하던 몽골군과 다르게
    철저하게 거란투항군+몽골군으로 이루어진 유목 군대였던 것 같습니다.
    기껏해봐야 10만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 최정예 유목 부대가운데 수천에서 수만의
    병력이 고려로 총출동했던 셈인데..

    고려 조정은 최씨일가에 장악되어 제대로 병력대항도 안 하고..

    백성들은 어마어마하게 죽어나가고... 참 답이 없는 전쟁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 younghwan 2011.08.01 1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처인성은 백제 토성으로 보이며, 아마도 대몽항쟁시 방어를 목적으로 주둔했던 것이 아니라 매복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