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삼국시대 유적_고분

경주 계림 (사적 19호),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 탄생 설화를 간직한 숲

younghwan 2011. 9. 30. 17:38
반응형


 경주 궁성인 월성(반월성)의 정문격이 북쪽 출입문을 나서면 서쪽편에 작은 숲을 볼 수 있다. 특별히 문화재로 분류할 수 있는 유적,유물이 발굴된 장소는 아니지만 신라 천년을 이끌어온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 탄생 설화가를 간직하고 있는 계림이다. 계림 내부에는 아주 오래된 고목들이 많아 하나의 독특한 숲을 이루고 있고 계림 끝부분에는 경주김씨 세습 체제를 구축한 내물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점은 우연이 아닌듯 하다.

 이 숲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금궤속에서 경주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역사기록에 남아 있다. 경내세워진 비석은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현재 언덕처럼 보이는 곳이 신라의 왕궁이었으며, 계림과 첨성대가 있는 궁성 뒤편은 후원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계림을 기준으로 서쪽편에는 내물왕릉에서 시작하여 크고 작은 고분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으며, 동쪽편에는 궁굴에 부속된 사찰과 전각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는데 그 건물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경주 월성(반월성)에서 정문격인 북쪽으로 난 출입구를 통해서 나오면 멀리 첨성대가 보이고 왼쪽편에 울창한 숲이 있는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 탄생설화가 담긴 경주 계림을 만날 수 있다. 원래 신라왕궁은 영역이 월성 내부였으나 통일 후에는 첨성대가 있는 영역까지 왕궁이 확장되었으며 그 영역안에는 내물왕릉을 포함하여 초기 왕들의 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경주 월성 왕궁에서 계림을 비롯하여 북쪽편 사찰과 전각으로 연결되는 성문 문루가 있었던 곳에는 출입로로서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경주 계림 입구에 있는 아주 인상적인 오래된 고목으로 줄기는 거의 없어져 버렸지만 가지는 살아 남아 있습니다. 계림은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경주에서 신성한 장소로 계속 여겨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계림 내부에 있는 조선 순조때 세운 김알지 탄생 설화가 적힌 비석이 모셔진 비각이다.


계림을 이루고 있는 울창한 고목들


계림 내부에는 울창한 고목들만 있는 공원같은 숲이지만 신라를 대표하는 성역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이다.


계림 밖으로는 첨성대와 통일신라의 왕궁이 있던 건물터가 지금은 아주 넓은 초원을 들판에 남아 있다. 그 너머로는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있는 대릉원이 보인다.


옛 궁궐 건물터와 계림의 울창한 숲.


조명을 받아서 빛나는 경주 계림의 야경


조명을 받아서 아름다운 색을 연출하는 고목


계림 맞은편에 위치한 첨성대.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이라 하였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 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스러운 곳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있다. <문화재청>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