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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공주 공산성] '이괄의 난' 이야기가 남아 있는 쌍수정과 백제 왕궁터

younghwan 2009. 11. 29.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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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 공산성을 이루고 있는 구릉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쌍수정이다. 이 곳 쌍수정은 지금은 나무가 많아서 주위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주위를 훤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이괄의 난'의 난을 피해서 인조가 6일동안 근심하면서 이 곳 쌍수정에서 반란 진압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에 있던 나무에 정삼품의 벼슬을 내리고 쌍수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쌍수정 아래 약간 넓은 공간에는 백제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을 당시의 건물터로 보이는 유적과 우물이 발굴되었으며, 아마도 초기에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공산성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쌍수정. 이 곳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는 인조의 모습을 상상하니 처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쌍수정 누각과 편액

공산성 쌍수정 아래로는 백제 왕궁지로 추정되는 여러 건물터 들이 있다.

공산성 쌍수정(雙樹亭)
1734년에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하여 왕이 공산성에 머물렀을 때 두 그루의 나무 밑에서 반란의 진압 소식을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진압되자 왕은 쌍수에 정삼품 통훈대부를 명하고, 성을 쌍수성이라 부르도록 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영조 때에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삼가정을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출처: 공주시청>

쌍수정 아래에 위치한 쌍수정 사적비. 비석의 규모가 상당히 큰 것 같다. 비의 글과 글씨를 당대의 권세가인 영의정을 지낸 사람들 썼다고 한다.

쌍수정 사적비
이 비는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 곳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새긴 것으로 1708년에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에는 이괄의 반란과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을 쓰고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간의 일도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지은 것이며, 글씨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쓴 것이다. <출처:공주시청>

공산성 쌍수정 아래 서쪽편 건물터.

공산성 백제 건물터 중에서 동쪽편에 있는 건물터로 작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편 건물터로 제법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쌍수정 바로 아래에 있는 두동의 건물터


추정 왕궁지
이곳은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웅진시대 초기의 왕궁터로 추정된다. 1930년대에 쌍수정 광장으로 불리던 넓이 약 1,600평방미터를 운동장으로 만들 때에 건물의 주춧돌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1985년 발굴 조사 때 10칸,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돌로 쌓은 둥근 연못터 및 목곽의 저장 시설 등 각종 유적이 확인되었고,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일부 건물터에서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우는 방식인 굴건식 유구가 확인되어 백제가 수도를 옮기기 전에도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성 쌍수정 아래에 있는 연못
 
공산성 연못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초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터 연못이다. 공산성은 1985년부터 3회에 걸쳐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왕궁건물터, 나무로 만든 저장시설, 저장구덩이 등과 같은 유구와 백제와당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연못은 본 건물의 정면에 지면을 깊제 파고 자연석을 쌓아 원형으로 만들었다. 특히 연못의 호안성 뒷부분에는 물이 밖으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1m 너비의 점토를 다짐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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