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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유물 - 석수(石獸)/지석(誌石)/목관

younghwan 2009. 11. 3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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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공주박물관은 규모가 있는 박물관이지만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럴 정도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이 많고, 역사적/문화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로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가 많다.

 그 중 왕릉을 대표한 유물로는 왕릉 입구를 지키는 석수, 묘지의 주인을 밝혀주는 지석, 왕의 시신이 있던 목관이 있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후대 왕릉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령왕릉 입구 모습을 재현해 놓은 듯. 입구에 단지와 밥그릇, 숟가락이 있고, 그 뒤에 이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지석과 무덤을 지키는 석수가 있다. 석수와 지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무령왕릉 입구를 지키는 석수. 돌로 만든 신화에 나오는 동물상으로 무덤이나 궁전 앞에 세워두는 석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후대의 왕릉이나 궁궐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중국 문화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석수(石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만들어진 석수이다. 석수(石獸)란 돌로 만든 동물의 상(像)으로 좁게는 궁전이나 무덤 앞에 세워두거나 무덤 안에 놓아두는 돌로 된 동물상을 말한다. 무령왕릉 석수는 높이 30.8㎝, 길이 49㎝, 너비 22㎝로 통로 중앙에서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입은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다.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제 뿔이 붙어있다. 몸통 좌우, 앞·뒤 다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꼬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배설 구멍이 달려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무덤 수호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무녕왕릉 입구에 있는 지석.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로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지석이다. 원래의 목적은 도교 사상이 반영된 내용으로 토지신에게 이 땅을 샀음을 문서로 작성하여 돌에 새겨 놓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뒷면에 무덤의 주인에 대한 기록을 추가하였다고 한다.

지석(誌石)
이 지석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이다. 이 2매의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넣은 매지권으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왕의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이며, 표면에 5∼6㎝의 선을 만들고 그 안에 6행에 걸쳐 새겼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12방위를 표시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왕비의 지석인데 가로 41.5㎝, 세로 35㎝이며, 2.5∼2.8㎝ 폭으로 선을 긋고 4행에 걸쳐 새겼다. 선을 그은 부분은 13행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뒷면에는 매지문(買地文:땅을 샀다는 문서)을 새겼다. 원래 매지권은 무령왕을 장사지낼 때 만들어진 것인데 그 후 왕비를 합장하였을 때 이 매지권의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에 관한 묘지문을 새겼던 것이다. 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풍습이 담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문화재청>

무녕왕과 왕비의 목관. 목관에 부착된 장식, 못, 고리 등과 함께 발굴되었다.

목관을 장식하는 장식과 못, 고리
 
무령왕, 왕비의 목관은 모두 5cm 두께로 잘 다듬은 판재를 짜맞추어 상자모양의 관을 만들고 그 위에 여러 장의 판재를 짜맞춘 뚜껑을 덮어 마치 맞배지붕의 가옥처럼 만들었다. 목관 판재의 안팎에는 두텁게 옻칠을 하고 관고리와 관못에도 은꽃으로 장식하여 그 품격을 더해주고 있다. 왕, 왕비의 목관 모두 홈을 파서 결합하고 못의 모양이나 장식 그리고 관을 운반하기 위한 관고리가 모두 같아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왕의 목관이 5장의 판재 뚜껑을 짜맞춘데 비하여 왕비의 목관은 보다 넓은 판재 3장으로 짜맞춘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한편 목관의 뚜껑과 측판의 안에는 금박이 입혀진 작은 청동 못들이 각각 3열,1열씩 박혀 있어 관내부에 비단과 같은 천을 붙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와 같은 목관은 무령왕릉보다 약간 늦은 시기의 무덤인 익산 쌍릉에서도 나왔다. 그러나 관못이나 관고리 장식이 같은 점 이외에, 머리쪽이 넓고 발쪽이 좁으며 한 장의 판재로 만든 뚜껑 등은 낙랑의 목관에 많이 보인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목관은 무령왕릉 목관만이 지니는 독특한 구조로 된 목관이라 할 수 있다. <출처: 공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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