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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파주 자운서원과 율곡 이이선생 유적지

younghwan 2011. 7. 2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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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 선생과 그 제자인 김장생,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으로 원래의 건물들은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한국전쟁 등으로 대부분 없어지고, 해방후 유림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과거자료 고증을 통해서 복원한 건물들이라 한다. 건물자체로는 문화재로서 가치는 없지만, 이 곳이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하여 그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묘역이 가까이 있기때문에 선생이 태어난 강릉의 오죽헌과 함께 율곡 선생의 유적지로서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운서원은 앞쪽에 강학공간인 강인당과 기숙사인 동.서재가 있고, 뒷쪽에 사당인 문성사가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자연경관이 뛰어나거나 여행객들이 빈번하게 다니는 교통로에 위치한 서원이 아니고, 율곡선생 가족묘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서원으로 방문객들이 숙박할 수 있는 동.서재나 서원관리인의 살림집인 고직사 건물을 크게 지어 놓지는 않고 있으며, 사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만을 두고 있는 수도권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운서원을 포함한 율곡선생 유적지 입구


입구 서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율곡선생 신도비


율곡선생 신도비에서 조금더 올라가면 자운서원을 볼 수 있다. 자운서원은 앞쪽에 강학공간이 뒷쪽에 배향공간이 있는 전학후묘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자운서원 외삼문인 자운문

1. 자운서원 강학공간인 강인당


파주 자운서원은 수도인 한양과 가까이 있었던 까닭에 서원의 규모도 크지 않고, 경관이 수려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지 않은 까닭에 누각을 비롯하여 정원을 꾸며놓지도 않고 있다. 자운서원 건물은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졌고, 건물도 한국동란때 완전히 파되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에 고증에 따라서 복원된 것이라 한다.


자운서원의 강학공간은 강당인 강인당과 마당 좌.우에 배치된 유생들의 기숙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물의 크기도 크지 않은 편이다.


2. 자운서원 묘정비, 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석


파주 자원서원 배향공간인 문성사 출입문인 외삼문 왼쪽편에 있는 묘정비이다. 자운서원은 효종때 자운이라른 편액이 내려졌고, 그때 묘정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비문은 당대 유학자인 송시열이 지었다고 전해지며, 글씨는 예서체로 김수증이 썼다고 전해지면 보기에도 글씨를 깨끗하게 잘 썼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3. 자운서원 배향공간인 문성사


자운서원 문성사는 율곡 이이선생과 제자들인 김장생 선생, 박세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어진 것을 60년대에 중건한 것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사당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전학휴묘의 공간배치에 따라서 자운서원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인 서원이나 향교의 경우 대정전이나 사당들의 출입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 자운서원의 문성사는 아산 현충사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 누구나 참배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율곡 선생이 영정이 같이 모셔져 있다.


문성사 사당 내부에 모셔진 율곡선생의 영정과 위패. 뒷편에 신사임당의 표충도(복제)가 그려진 병풍이 보인다.


사당 출입문인 외삼문


자운서원(紫雲書院)은 이이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는 서원이며, 효종의 친필 사액으로 세워졌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위치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이이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유물이 전시돼 있고 인근에 율곡교원연수원과 두루뫼박물관 및 술이홀통일박물관이 있다. 부지(넓이 8만평)가 넓고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한적하여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매년 9월에는 율곡문화제가 개최된다. 서원이 들어선 감악산, 자운산 자락에는 율곡이이 묘와 이이의 부모 유품을 비롯해, 신사임당 묘, 윤관장군 묘 등의 시도 기념물이 많이 위치해 있다. <출처:위키백과>


율곡 이이 선생 가족묘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이 자운서원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다.


자운서원 율곡 이이선생 유적지는 공원처럼 넓게 조성하고 있고, 가족묘 입구에는 연못이 있다.

4. 율곡 이이 선생 가족묘


자운서원의 원래 건물들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한국전쟁으로 없어졌지만, 전국에 있는 율곡선생을 모신 여러 서원 중에서 자운서원이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 곳이 율곡 이이 선생과 그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묘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율곡 이이선생과 신사임당이 태어난 강릉 오죽헌과 함께 율곡 선생을 대표하는 유적지로 자운서원이 자리매김 하고 있다. 역사 이래 우리나라에는 큰 업적을 남긴 수많은 위인들이 있지만, 어머니와 아들이 지폐에 등장하고 있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이 큰 영향을 지금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율곡 선생의 가족묘는 입신양명을 했다고 해서 율곡선생과 노씨부인은 묘가 제일 윗쪽에 있고, 그 아래로 큰 형, 아버지인 이원수와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합장묘, 그리고 아들 이경림 묘가 나라히 있는 형태로 되어 있고 그 주위 율곡 선생의 누님이 매창의 시부모를 포함한 가족묘가 같이 있는 것이 이색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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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어려서는 주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侍墓)했다. 1554년 성혼(成渾)과 교분을 맺었다. 그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스스로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유학에 몰두했다. 1558년 23세 되던 해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李滉)을 방문했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왕복문변(往復問辨)했다. 156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 1564년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된 뒤 예조좌랑·정언·이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1년 다시 청주목사로 복직했고, 다음해 다시 해주로 낙향했다.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했으며, 다음해 우부승지·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그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하고,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581년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49세를 일기로 죽었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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